
* 환청, 자살, 정신 착란 등의 트리거 요소가 있습니다. 주의 부탁드립니다.
기존 스토리와 동떨어져 있습니다.
춥다, 비가 오는 모양인지 창문 너머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피렌체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밀라노에나 내릴 것이지, 이츠키 슈는 작게 중얼거리며 이불 속에서 나왔다.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자 물로 인해 불어난 아르노 강의 표면이 보였다. 비가 내려서 그런지 평소와 달리 잠잠한 모습이 아닌 빗방울로 인해 둥근 무늬를 그려내고 있었다. 이렇게 습기가 가득 찬 날에는 복원 작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미술 작품들은 대게 습기에 약했다. 그리고 저도. 습기에 약했다. 자신은 예술 작품이 아니었다. 고작 인간인 주제에, 습기에 약하다니. 이상하지 않아 마드모아젤? 이츠키 슈는 실없는 생각을 이어가다 책상 위에 얌전히 앉아있는 마드모아젤의 머리칼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미술 작품들은 대게 습기에 약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스스한 머리칼을 바로 매만지며 거울을 바라봤다. 모든 것이 연출, 보이는 것이 전부였다. 완벽하지 않은 것은 견딜 수 없었다. 뭐라도 먹고 작업장에 갈까 했지만 어째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크로와상도 떨어졌군. 현관 앞에 놓아진 긴 우산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손에 닿는 빗방울에 소름이 끼치는 것 같았다. 비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빗방울은 얼굴에, 머리사이에 스며들 듯 닿았다.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오는 빗물에 인상을 찌푸리고는 축축하게 젖은 끝부분을 가위로 자르듯 손가락으로 눌러 물기를 털었지만 워낙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소용없었다. 축축하게 젖어가는 옷자락에 입술을 깨물며 발걸음을 급하게 옮겼다. 맨발에 닿는 빗방울이 차가웠다.
공방은 걸어서 오 분 정도 떨어진 베키오 다리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커다란 석문을 통해 들어가면 화분이 가지런히 놓아진 안마당이 보였다. 마당 제일 끝에는 공방으로 통하는 작은 문이 있다. 나는 빗물에 젖어 짙게 변한 초록색 문 앞에 우산을 세워두고 공방으로 들어갔다. 공방에는 여기 저기 중세 조각과 유채화가 쌓여 있었다. 그 모습을 처음 봤을 때는 놀랐지만, 몇 번 보고나니 이제는 익숙해져 아무렇지도 않았다.
스승님 왔나. 슈는 익숙한 풍경을 지나쳐 복원실로 들어가려다 귓가에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돌아 상대를 마주 봤다. 카게히라. 카게히라는 이 공방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원생이었다. 얼마 들어오지 않은 주제에, 재주는 있는 모양인지 금세 안젤로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제게 꼬박꼬박 스승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영, 이상하기만 했다. 대체 왜 그렇게 부르는 거지? 언젠가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저가 묻는 말에 고개를 기울이다가도, 그런 이상한 말이 어디 있나, 스승님이니까, 스승님이지. 하는 대답을 뱉어내곤 했다. 오늘도 이곳에서 밤을 샌 건가. 저 역시 야간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이틀 이상의 철야는 허락하지 않는다는 안젤로의 말에 억지로 집에 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뒤처질 지도 몰라. 이츠키 슈는 제 자리에 놓인 앞치마를 매고 자리에 앉았다.
슈우, 오늘따라 방해꾼이 많은 편이었다. 고개를 돌리면 공방주인 안젤로가 보였다. 안경의 금테 줄이 셔츠 위에서 부드럽게 흔들 거렸다. 안젤로는 반갑다는 듯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안젤로는 항상, 그의 이름을 불렀다. 슈우, 발음이 길어서 그런지 꼭 나른하게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무슨 일이지. 그의 손에는 처음 보는 작품이 들려 있었다. 아마, 저건. 저가 예전부터 눈독 들이고 있던 작품인 것 같은데. 안젤로는 그의 시선을 눈치 챈 모양인지 환히 웃으며 그의 손에 프레스코화를 쥐어주고 어느 부분을 복원해야 되는지 조목조목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 설명해도, 슈 너는 모자라다고 생각 할 거지? 안젤로의 말에 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안젤로는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뒤돌아 자기 갈 길을 갔다.
이츠키 슈는 그의 뒷모습을 보다 제 손에 쥐어진 프레스코화를 봤다. 15세기경 프레스코화로 그려진 프란체스코 코사의 4월 - 비너스의 개선행렬. 이 그림은 4월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런 걸 내게 맡기다니, 긴장감에 떨리는 제 손을 내려다 보다 시선을 옮겼다. 아, 드디어.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제게 복원 의뢰가 온 것들은 많았지만, 그 중 저가 원하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저, 연습이라고 생각했던 작품들이 전부인데. 이츠키 슈는 떨리는 손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제일 끝에 있는 복원실로 걸음을 옮겼다.
복원실에는 카게히라가 작업을 하고 있었다. 분명 듣기로는, 일본에 예술 대학에서 복원 양성교육을 받다가 올해 이탈리아로 돌아왔다고 들었는데. 이츠키 슈는 그가 왜 이런 작은 공방에 들어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개인의 사정이 있을 테니까. 남의 사정을 캐내는 것은,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카게히라는 슈가 들어온 것도 모른 채 복원 작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가 복원하고 있는 것은 15세기경 템페라기법으로 그려진 프란체스코 코사의 수태고지 제단화이었다. 정식적으로 배운 그의 솜씨는 완벽해 보였다. 처음에는 노력만 하면 모든 것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최근 그를 보면서 느낀 감정이었다. 무어든 재능이 중요했다. 아무리 노력해서 제 안에 있는 것을 갈고 닦아도 이미 완성 된 재능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살리에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살리에리는 무엇을 해도 모차르트를 이길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이길 수 있을까. 이츠키 슈는 카게히라의 손에서 복원 되어 가는 그림을 빤히 바라보다 시선을 옮겼다.
아, 발끝에 걸린 바구니가 덜컥거리며 흔들렸다. 카게히라는 그제야 그가 온 것을 안 모양인지 복원 하던 것을 내려두고 날 보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스승님 왔나. 맑은 그의 목소리가 복원실에 울려 퍼졌다. 슈는 눈을 가늘게 뜨다가도, 그와 떨어진 자리에 자리 잡았다. 하지만 카게히라는 이츠키 슈의 곁으로 오더니 그가 복원해야 될 작품을 보며 웃어 보였다.
내랑 같은 화가 작품이네, 좋겠다. 스승님 이거 하고 싶다 하지 않았나. 프란체스코 코사의 작품 좋아했응께. 슈는 귓가에 쏟아지는 그의 말에 그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시선을 옮겨 그를 바라봤다. 네 작품에 더 집중해야 되는 거 아닌가? 카게히라는 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내는 거의 다 했고, 스승님 하는 게 더 보고 싶응께. 내 여기 있으믄 안 되나? 안 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에게 저가 복원을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아, 속에서 불쾌한 감정이 크게 출렁이는 것 같았다. 이츠키 슈는, 카게히라 미카가 이런 식으로 다가올 때마다 같은 감정을 느꼈다. 그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하지만 이건. 사실 저도 알고 있었다. 이 감정의 정의를. 하지만 모르는 척 할 뿐이었다. 저 자신이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 끝이 보인다 하더라도, 가서 집중해. 내게 신경 쓰지 말고. 결국 날이 선 말이 튀어 나왔다. 카게히라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흐응, 하고 작게 소리를 뱉어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그제야 조금 조용해졌다. 이츠키 슈는 다시 작업에 집중하기 시작한 그를 바라보다, 다시 시선을 돌렸다. 속이 울렁거렸다.
초초한 마음과 달리 작업 속도는 더디기만 했다. 제 작품보다 뒤돌아 있는 카게히라의 뒷모습을 보는 시간이 더 길었다. 시곗바늘은 발이 달린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벌써 이 시간이네, 스승님은 안 가나? 카게히라는 어느새 자신의 흔적을 정리하며 물었다. 이츠키 슈는 복원 작업이 더딘 제 작품을 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어제 집에 갔다 왔으니, 오늘은 철야를 해도 됐다. 카게히라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너무 늦게까지 있지 말라며 복원실의 문을 닫고 나갔다. 평소에는 항상 옆에 있더니, 오늘은 웬일인지 먼저 자리를 떴다. 이츠키 슈는 그가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작업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시선은 연신 그가 남기고 간 그림에 쏠렸다.
해가 뜨기 전이었다. 새벽에는 늘 이상한 감정이 휩싸이곤 했다. 이츠키 슈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인 제 작품을 내려다 봤다. 분명, 분명 할 수 있는데. 제 생각과 달리 작업은 여전히 더디기만 했다. 왜,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그라면 분명 쉽게 해결했겠지. 하지만 저는 아니었다. 방법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쉬이 해결이 되지 않았다. 슈는 제 손에 쥐어진 망치를 꽉 쥐고 그의 작품을 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봐도 완벽하게 복원 돼가고 있는 작품이었다. 망가뜨리기 아까울 정도인 작품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나는, 할 수 없어. 무슨 이유든 작품을 망가뜨리는 행위에는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게 그라고 생각하면 나는....... 망치를 쥐고 있는 손에 힘이 풀렸다. 덜컥, 무거운 망치가 바닥과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뱉어냈다.
왜, 못하겠나. 마음이 마이 여리네. 내 기회까지 줬는데. 마음 한 구석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나는 하지 않는 거야. 이츠키 슈는 애써 그의 작품을 외면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아니야. 나는, 이 작품을 망가뜨릴 수 없어. 이게 그라고 생각해도 나는...... 아니, 저는 하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못 하는 것이지. 귓가에 키득이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망치를 다시 쥐었다. 망치를 쥔 손이 차게 식는 것 같았다. 내뱉어지는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떨리고 있었다. 슈는 목판의 모서리를 움켜쥐고 망치로 내리쳤다. 부셔지는 목판의 파편들이 복원실 이곳저곳에 튀었다. 충동적인 행위였다.
이츠키 슈는 떨리는 호흡을 뱉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슨 짓을. 질투에 눈이 멀어 해서는 안 될 일을 해버렸다. 분명 쫓겨날 것이다. 무엇보다 제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고작 감정 하나 제대로 조절 하지 못해서, 작품을. 떨리는 손으로 파편을 한곳으로 모아둔 뒤 급하게 짐을 챙겨 밖으로 나와 버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물 때문에 바지 밑단이 젖어 축축했다. 정신을 차려보면 그는 뛰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피렌체에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의 몸은 쫄딱 젖은 생쥐 마냥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빗물에 젖은 몸이 무거웠다. 이츠키 슈는 무거운 몸을 이끌어 욕조로 들어가 기대앉았다. 젖은 옷을 벗어야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몸은 쉬이 말을 듣지 않았다. 뜨거운 물이 다시금 몸을 적셨다. 시야가 금세 뿌옇게 변했다. 차게 식은 손은 굳은 듯 잘 움직이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고는 물장난이라도 치듯 손을 움직였다. 찰방이는 물소리가 요란스럽게 욕실 안에 울렸다. 물속 깊숙이 얼굴을 박아 넣고 숨을 참았다. 귓가에 물이 찬 건지 주변 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축하해, 스승님. 스승님이 해냈으니까, 내를 이긴 거네. 물이 차 먹먹한 귓가에 누군가 속삭였다. 모든 소리가 웅웅거리며 벌레 날갯짓처럼 들렸지만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만은 선명하게 들렸다. 이츠키 슈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아니야, 그는 애써 부정하며 고개를 저었다. 귓가에 울리는 소음이 듣기 싫어 다시 물속으로 들어갔다. 시야가 금세 물로 가득 차 뿌옇게 보였다. 느리게 눈을 끔벅이다 이내 감아 버렸다. 어둠이 온 몸을 감싸는 것 같았다. 아, 내뱉는 말들은 수면 위로 올라갈 듯 했지만, 이내 물속 깊이 가라앉아 파편으로 조각났다. 이츠키 슈는 숨 쉬는 방법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들이 마시고, 마신 걸 다시 내뱉고, 그 쉬운 걸 왜 못할까. 손을 수면 위로 뻗어 보였다. 마른 팔이 시야에 들어왔고, 길게 뻗어 있는 손가락이 뒤늦게 보였다.
시야에 프란체스코 코사의 수태고지 제단화가 떠올랐다. 그의 작품, 아니 그가 다시 생명을 불어넣고 있던 작품! 이츠키 슈는 그것을 직접 제 손으로 망가뜨렸다. 작품의 생명력을 뺏었다. 그것은 이제 작품이 아닌, 생명을 잃은 나뭇조각이 됐다. 눈을 감으면 제 손에서 망가지고 있던 작품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뻗은 손을 목덜미에 올린 뒤 조심스레 힘을 줬다. 제 목을 조이고 있는 손에 힘을 줬다. 꽉, 온 몸에서 물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물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라가는 것 같았다.
오랜 시간 동안 욕조 안에 앉아 있다 나와 가운을 걸쳤다. 젖은 옷 위로 걸쳐진 가운의 느낌이 기분 나쁘기만 했다. 머리칼이 물기에 잔뜩 젖어 무거웠다. 머리칼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침대 시트 위에 동그랗게 자국을 남겼다. 침대 끝에 걸터앉아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발신인이 누구인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거울을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핸드폰을 바라봤다. 핸드폰은 한참동안 울리다 제 풀에 지쳤는지 잠잠해졌다. 저는 분명 마주쳤다. 저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 양쪽 색이 다른 그 눈동자. 그 눈동자는 욕망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대체 그는 무엇을 욕망하고 있었던 것일까. 노력은 재능을 이길 수 없다. 제 손으로 부수지 않았으면 그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이츠키 슈는 그의 재능을 질투했기에 그 자신을 부셨다. 그래, 그를 질투했다. 저가 갖지 못한 그 재능을, 그런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느긋한 그의 모습을. 저는 그런 것들을 질투하고, 욕망했다. 지금 내손에 남은 건 무엇이지, 그를 이겼다는 점 하나? 이츠키 슈는 손을 들어 가만히 내려다 봤다. 손은 깨끗했다. 손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았다. 비누 냄새가 났다. 나는 더럽혀지지 않았다. 이츠키 슈는, 여전히 깨끗했다.
여길 떠나야 돼, 일본, 아니 일단 피렌체에서 벗어나고 생각하자. 생각이 거기까지 닿고 급하게 짐을 싸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이곳을 떠나자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캐리어에 무엇을 넣을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아, 다시금 울리는 핸드폰에 시선을 옮겼다. 카게히라 미카. 이츠키 슈는 충동적으로 핸드폰을 쥐고 거울을 향해 집어 던졌다. 쨍! 겨울 파편이 부셔지며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부셔진 파편 위에 그의 모습이 일그러져 보였다. 거울 속 그의 모습은 파편대로 부셔져 있었다. 질투에 일그러져 망가진 모습이 보였다. 아, 파편 위로 캐리어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피렌체에서 비가 내리는 것은 어울리지 않다니까, 밀라노에나 내릴 것이지, 이츠키 슈는 작게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물웅덩이 위로 그의 뒷모습이 비쳤다. 올라간 입꼬리가 힘겹게 떨리고 있었다. 비 내리는 피렌체 거리는 여전히 어색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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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목소리가 들려요? 의사는 그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남자는 의사의 질문에 찌푸리고 있던 표정을 풀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의사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으며 부정의 뜻을 보이는 제 행동에 손뼉을 치며 어깨를 토닥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그림이었다. 비록 그 속은 썩어 있을지라도. 이츠키 슈는 의사에게 보이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작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웃음이었다.
언제부터 소리가 들렸는지 그 시기를 기억하지 못 했다. 피렌체에서 돌아오고 나서부터였나, 아니면 그냥 자연스럽게, 물에 물감이 번져 퍼지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렸던가, 이츠키 슈는 희미한 기억을 뒤적이다 미간 사이를 좁혔다.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계기가 중요한가. 그는 느릿하게 눈을 끔벅이다 시선을 옮겼다. 머릿속이 다시 희게 물들어 갔다.
그에게 말을 걸어주는 소리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사랑스러운 파트너였다. 소리는 늘 그의 편이었다. 모두 다 내게 부정의 말을 뱉을 때 소리만이 내에게 괜찮다는 위로와 긍정의 말을 뱉어 나를 기쁘게 해줬다. 그런 소리를 그는 배신할 수 없었다. 그는 소리를 버리기 싫었다. 소리가 자신에게 이득을 주지 않아도 괜찮았다. 날 배신하지 않기만 하면 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 머릿속에 있는 소리에게 다정하게 말하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병원에 간 것도 타인에 의해 간 것이었다. 그에게 소리가 들렸을 때, 사람들은 그제야 그에게 바른 관심을 가졌다. 제게 괜찮냐며 정신과를 추천해주기도 했다. 그 전에는 어딘가 망가진사람 취급이나 했으면서. 나는 사람들의 걱정에 애써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한 척을 하는 것도 힘들군, 이제 들어갈까. 이츠키 슈는 병원에서 나와 평소와 같이 제 연인에게 말을 걸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무리 불러도 소리는 평소와 같이 들리던 달콤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병원에 간 것이 무서워서 숨어버린 것일까. 그는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옷자락을 매만졌다. 초조함에 손이 벌벌 떨렸다.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했다. 머리를 쓸어 넘기다 손톱을 뜯었다.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내가 병원에 가서? 네 존재를 지우려는 시도를 해서? 이유를 나열하자면 수없이 늘어날 것 같았다. 한참동안 소리가 나오지 않자 그는 더욱 더 불안해졌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진정시키려 해도 쉽사리 진정 되지 않았다. 가쁜 호흡은 뱉어지기만 했지 삼켜지지 않았다. 숨이 모자란 기분이 들었다. 물기에 젖은 목소리는 힘없이 떨어져 바닥에 흩어졌다. 내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리조차 제 편이 아니었다. 절망감에 흙바닥을 긁어내리며 입술을 뜯었다. 소리가 없어졌다. 이건 그가 원치 않던 일이었다. 다시 혼자가 됐다. 다시 혼자가 되자,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기억들이 다시금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야. 카게히라 나는, 내가 원했던 일이....... 다시금 떠오른 이름을 읊조리다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나는,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 것처럼 숨이 차올랐다. 가쁜 숨을 뱉어내다 고개를 숙였다. 눈앞이 새까맣게 변해갔다.
소리가 사라진 뒤 그의 삶은 무채색에 물들어 갔다. 이츠키 슈는 그 무채색 안에서만 살아갔다. 불현듯 의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매번 들리던 목소리가 사라지면 주변 환경이 더 끔찍하게 느껴질 수 있다고, 의사의 말이 맞았다. 소리가 사라진 후 잠이 늘었고, 또 무기력해졌다. 무채색의 방에 형형색색의 소리들이 가득 찼지만 정작 그가 찾는 소리는 없었다.
애써 무기력함을 떨치기 위해 오랜만에 외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간만에 나온 외부는 다소 어색했으나 싫진 않았다. 밖은 화창하고 따뜻했다. 이츠키 슈는 그런 날씨가 본인과 어울리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근한 봄날에 맞지 않게 긴 옷을 입은 남자는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한참 거리에 서있었다. 온갖 소리가 귓가에 들어왔다. 귓가에 들어오는 소리는 남자가 찾는 것이 아니었다. 숨이 가쁘게 차올랐다. 무엇이 불안한지 지그시 입술을 깨물다 귀를 막고는 급하게 제 방을 향해 달려갔다. 밝은 소리가 남자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도망치듯 달려 방으로 들어와 담요로 제 몸을 휘감았다. 따라오는 소리가 무너져 허공에 흩어졌다. 소리가 사라진 후 처음 느낀 공포감이었다.
목 놓아 제 연인을 불렀지만 여전히 머릿속에서 들리는 소리는 없었다. 소리 대신 적막이 방 안에 가득 찼다. 숨 막힐 것 같은 적막이었지만 오히려 이런 조용함이 더 안심이 됐다. 남자는 제 머릿속 애인이 사라진 후 모든 소리를 지웠다. 귀를 막고 문의 틈새를 막았다. 그렇지 않으면 못 버틸 것 같았다. 하지만 소리는 저가 지운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저가 아무리 피해도 소리는 어떻게 저를 찾는지 귀신같이 따라 붙었다. 방 밖에 나가면 온갖 형형색색의 소리가 저를 반겨줬다. 이제 안전한 곳은 방 밖에 없었다.
지독한 적막 속에서 살길 원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찾던 소리가 다시 돌아 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가 원하는 것과 다르게 소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날 떠나 버린 거야, 내가 잘못해서. 저는 자책하며 텅 빈 허공을 보며 혼잣말을 내뱉었다. 혼잣말은 벽에 부딪히며 작은 조각으로 깨져 없어졌다. 방 안은 다시 침묵으로 가득 찼다.
이츠키 슈는 힘없이 벽에 기대있다 손을 뻗어 제 머리칼을 문지르며 소리와의 추억을 더듬었다. 처음 소리를 들었을 때는 느끼는 감정은 공포였는데, 지금은 그리움이 되어 버렸다. 아마 영영 안 오겠지, 이럴 거면 차라리 그에게 말 할 걸 그랬다. 사실 나는 너를, 너를 욕망했다고. 네 재능을, 절 바라보는 눈동자를, 네 모든 것을 욕망했다고. 조용히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눈물을 흘리다 불현듯 큰 소리로 웃으며 고개를 젖혔다. 모든 것이 사라진 지금 남은 것은 자기 자신 하나뿐이었다. 이츠키 슈는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아. 저가 원했던 것이 이루어졌다. 방 안에는 제 목소리만 가득 찼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텅 빈 방안에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어두운 방에 홀로 빛나는 tv는 이질적이기만 했다. 귓가가 먹먹했다. 겨우 몸을 일으켜 빛으로 시선을 옮겼다. 제 시선 끝에 닿는 것을 보다 짧게 웃어 보였다. 아, 제 시선 끝에 닿는 그는 밝게 빛나고 있었다. 제 손을 망가뜨린 그가, 그의 작품이. 그 누구보다 환하게. 저는 이렇게 망가졌는데. 너는, 입술 사이로 잔뜩 망가진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너를 욕망했어. 카게히라, 나는 네 작품이, 네가 무너졌으면 했어, 그런데 너는 왜. 나는 지금 이렇게, 무너지고 있는데. 온갖 말들이 두서없이 뱉어졌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점점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래, 너는 죄가 없지. 무거운 몸을 겨우 일으켰다. 마른 팔이 휘적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손을 뻗어 종이를 쥐었다. 바싹 마른 종이가 손끝에 잔뜩 일그러졌다.
흘끔 시선을 돌려 tv를 바라봤다. 화면 속 너는 너무나도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시선이 맞닿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승님. 네가 절 부르는 것 같았다. 손안에 쥐고 있던 종이들이 널브러지며 흩어졌다. 그것들을 가만히 보다 짧게 헛웃음을 뱉어냈다. …, 내가 끝내야 돼, 내가, 내가…. 천장에 매달려 있는 밧줄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 가쁜 숨을 토해내다 고리에 얼굴을 비집어 넣었다. 목에 닿는 밧줄의 느낌이 생소하기만 했다. 와 가려고 하는데, 내랑 있자. 그제야 소리가 들렸다. 짧게 숨을 삼켜내다 발끝에 닿는 의자를 밀어냈다. 대롱대롱, 몸이 공중에 뜨는 느낌과 동시에 숨이 막히는 것이 느껴졌다. 스승님, 내를 사랑했나. 시야가 흐릿해졌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를 이길 수 없어. 그렇지 카게히라. 목소리는 다시 답이 없었다. 시야가 흐릿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다시 피렌체였다. 아, 입꼬리가 겨우 올라갔다. 모든 것이 다시, 돌아왔다. 그제야 웃음이 나왔다. 대롱대롱, 힘없이 늘어진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그는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그건,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