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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존재할지도 모르는 현재에 관한 이야기다.

 

***

 

  얇게 빠진 몸선, 부드럽게 뻗어 올라가는 고음,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연출에 휘황찬란한 무대 장치. 특별한 흠이 없는, 최고의 무대. 사랑스러운 시간. 그걸 입증이라도 하듯 무대를 가득 채운 박수소리. 사람들이 고작 고등학생들의 공연을 입을 모아 찬양하는지 의문을 품었던 나조차,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길고 길었던 커튼콜까지 모두 끝난 후 그들은 미련 없이 인사했다. 이윽고 커튼이 쳐지고, 고작 관객에 불과할 뿐인 나는 이제 그곳을 벗어나야 했다. 나는 아쉬움에 입을 다시며 무대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나 두꺼운 벨벳 커튼은 굳게 닫혀, 다시 열릴 것 같지 않았다. 그제야 나는 몸을 돌려 교정을 빠져나오면서 아, 정말로 끝이구나 하고 짧은 감상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날로부터 시간이 꽤 많이 지났다. 나는 이 글을 쓰기 위해 그때를 생각해내려고 다분히 애썼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공연에 대한 구체적인 감상만 남아있고 기억은 잘 나지 않았다. 나는 감상만을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보고 경험한 것을 활자로 전달하는 사람이기에, 정말이지 실로 난처했다. 분명히 그 무대를 보고 그들의 세계관에 매료되어 한 동안 그들의 노래만 찾아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의 기억은 내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지운 것 마냥.

  나는 떠오르는 것을 메모에 하나씩 적어보기로 했다. 그 무대는 지상에 곧 착륙할 예정인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고개를 쭉 뻗어 위를 바라보면 그들의 발치가 어렴풋이 보였다. 무대의 높은 턱은 일부러 설정한 것이겠지. 내리깐 표정이 객석을 훑어지나가고, 담백한 스텝이 바닥을 울렸다…….

 

***

 

「어째서 거부하는 것이지? 이 오만한 것! 네게 있어 가장 명예로운 마지막을 부여하려는 나의 호의를 무시하는 것인가!」

「아, 나의 주인이시여! 부디 분노를 거두소서. 제가 받기에는 버겁습니다. 이미 당신의 친절에 목이 멘 걸요.」

「흥. 새치 혀놀림은 여전하군. 그런 얄팍한 사탕발림에 내가 넘어갈 성 싶더냐?」

「그러나 관용을 베풀 수는 있겠지요.」

「관용이라…….」

 

  그 다음 대사. 또 그 다음 대사. 다음에 다음. 다음에 다음을 이은 다음. 두 사람의 대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진행. 두 사람, 두 연기자 모두 이 연극에 심취한 듯 보인다. 세상에 오로지 둘만 남아있는 것 같겠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연기하니 서로밖에 보이지 않겠지. 오로지 손짓과 발성만으로 서로를 설득하고 있다.

  턱이 높은 무대의 전체를 보기 위해서는, 가장 앞자리보다 뒷자리에 자리하는 편이 유리하다. 이 공연의 핵심은 두 연기자를 이루고 있는 무대의 변화다. 이야기가 절정으로 치솟으며 의상이 변하고 조명의 세기나 배경이 바뀐다. 단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움직임은 그들을 사람과 흡사한 무언가로 보이게끔 만든다.

 

「그래. 관용. 너는 관용이 무엇이라 생각하지?」

「…일종의 절차입니다.」

「절차라 함은?」

「죄인을 더욱 죄인답게 만드는 절차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가?」

 

  그는 주인의 물음에 입을 다문다. 대답을 못 하는 건가? 아, 저건 동요가 아니다. 타이밍을 재고 있는 것이다. 관객이 긴장감에 숨죽일 타이밍을… 하나, 둘, 셋. 숨을 크게 들이쉬고 가슴에 한 손을 얹는다. 동시에 애수 어린 표정을 지으며 또렷한 눈빛으로 주인을 바라본다. 그리고 얌전히 대사를 시작하나 싶더니 돌연 입을 뻐끔거린다.

  적막이 가득한 공연장.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관객을 들었다 놓는 저 답지 않은 장난스러움을, 무대 장악력을. 아, 천재다. 그는 필시 천재임에 틀림없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리 생각하리라. 그는 신의 축복을 두 눈에, 두 손에, 그 입술에 머금고 태어났다고. 사람을 농락하는 그 재능, 신이 아니라면 악마가 주었겠지.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틀렸네. 생각은 늘 변하는 법이야.」

「그렇다면 주인님은 관용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관용이란, 지금 네가 취해야 할 행동이다.」

「..........」

 

  모든 대사가 끝난 주인과 남자는 무대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간다. 남자는 손을 다소곳하게 모았다. 주인의 두 발자국 뒤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마구잡이로 비틀거리는 게 여간 불안한 게 아니다. 남자는 곧 자신에게 닥칠 미래를 예견한 것 같았다. 운명에 조용히 순응한 모습은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애처로웠다.

  반면 남자의 주인은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무대 밖을 향해 걷는다. 당당한 걸음걸이다. 그의 앞을 막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태양조차 그가 바라보면 빛을 거둘 것이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마냥 밝지 않았다. 어느 쪽이냐 하면은 괴로움이다. 저건 괴로움이다. 그는 운명을 직전에 둔 남자보다도 훨씬 괴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그 감정은 정제되지 않은, 순수 그 자체였다. 그건 깨끗하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였다. 불순물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들이 오히려 풍부하고 자극적이게 만들었다. 두 사람의 발소리가 공연장을 가득 메웠다. 무거운 발걸음과 가벼운 발걸음. 관객은 그들의 무대 위에서 자취를 감출 때쯤에야 박수를 보냈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무대에 정신을 빼앗기게 된다. 아. 그래, 그 무대는…….

 

***

 

「무서워.」

 

  2막이 올라가고, 무대 한 가운데 서있는 사람은 남자의 주인이다. 망설이다 겨우 한 마디를 내뱉은 그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텅 빈 무대를 왔다 갔다 하기 시작한다.

 

「내가 어째서 당신을 죽여야만 하는 거지?」

 

  주인은 객석을 바라보며 절규한다. 처절한 물음은 관객의 동정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 물음의 끝이 어딘지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남자를 죽여야 한다는 것. 기어코 죽일 것이라는 사실. 이 공연의 마지막은 이미 결정돼 있다. 주인이 남자를 죽이고, 죽은 남자의 목은 본보기로서 전시되고, 주인은 그 모습을 보더니 이내 자취를 감춘다... 유명한 극이니 결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건 네게 주어진 역할이기 때문이야.」

 

  상수에서 남자가 걸어 나온다. 단호한 목소리로 읊은 대사에는 설득력이 있다. 남자의 말을 들은 주인은 그렇게 해야만 한다.

 

「나는 이런 역할을 바라지 않았어.」

「너는 해야만 해.」

「바라지 않았어...」

 

  주인은 괴로운 표정을 하다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잡고 그대로 주저앉는다. 남자는 그것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저 대사가 나왔으니 이제 곧 절정이구나. 소위 말하는 극중극 형태의 공연은, 남자와 주인을 각각 연기하는 두 사람은 대사를 칠수록 역할에 동화돼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가고 혼란스러워 한다. 그런데, 주인 역할의 저 배우, 못 보던 얼굴이군. 몰아붙이는 듯한 연기력에 눈치 채지 못했는데, 이제야 얼굴을 확인했어.

  한참동안 벌벌 떨던 주인 역할의 남자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관객을 응시한다. 결정을 내린 얼굴, 도대체 언제 망설였냐는 듯 결의에 찬 눈빛이다. 이어, 어떠한 말도 꺼내지 않고 남자에게로 천천히 다가간다.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춘다. 아, 저 입맞춤은 마지막으로 그가 남자에게 전하는 용서다....

 

***

 

  그 얼굴, 그 표정, 그 시선, 그 대사, 그 숨소리... 어째서 잊고 있었던 거지? 그 날은 지금껏 서왔던 배우가 아닌 다른 소년이 무대 위에 올라가있었다. 소년의 눈동자가 특이했던 게 분명 뇌리에 남았었다. 양쪽의 동공 색이 다른... 잊으려야 쉽게 잊을 수 없는 특징이다. 그런데 나는 왜, 소년에 대해 기억해내지 못했던 것일까. 대체 정체가 무엇일까. 무대 난입? 아니, 관객은 물론 바로 옆에 있던 남자조차 이상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꼭 처음부터 남자의 곁에 있었던 것처럼. 그의 존재가 옆에 있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이 사실을 알아차린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모두가 그에게 속고 있는 건 아닌가? 이유 없이 태어난 배역은 없고 의미 없이 진행되는 스토리는 존재치 않는다. ....... 나는 문득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만약에 공연이 처음부터, 그러니까 극의 형태가 처음부터 달랐던 것이라면? 극중극이 아니라, 처음부터 부조리극이었다면?

 

「당신이 지은 죄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테지만」

 

  그들이 나누었던 대사는 정녕 시나리오에 적혀있던 것 그대로인가? 이제와 새삼스럽지만 나는 그러한 대사들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건 누구의 대사지? 무엇을 위한 대화지? 아, 떠올린다는 게 이토록 버거운 일이었나. 나는 밀려오는 두통에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내 손에 묻은 당신의 후회가 내 목을 조르고 있어요.」

 

  예정된 배역의 부재. 새로운 배역의 탄생. 탄생, 그리고 죽음. 무대는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다. 주인이 남자를 죽인다는 결말처럼,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당신의 죄까지 함께 하고 싶어...」

 

  배역이 바뀐 지금, 원래의 결말이 의미 있는 것일까? 나는 펜을 내려놓았다. 열심히 휘갈겼던 메모를 찢어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나는 감상만을 늘어놓는 사람이 아니다. 직접 보고, 느끼고, 들은 것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다. 나는 두 사람이 섰던 무대를 다시 보지 않으면 안 됐다. 배역이 존재하지 않는 무대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존재 의미가 사라진 무대 같은 건 더 이상...

 

「스승님, 나는」

 

  더 이상 무대라고 부를 수 없다.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허구가 현실이 되는 과정.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는 두 사람밖에 알지 못한다. 객석은 그저 말없이 집중할 뿐이다. 두 사람의 끝을 가장 좋은 자리에서 직관하기 위해. 현실인지 가상인지 그건 관객에게 있어 중요한 게 아니다. 관객, 우리는 단지 지켜볼 뿐이다.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뿐이다.

 

「나는, 이 무대가 끝나도 계속 당신 곁에 있고 싶어...」

「이 극의 결말은 정해져 있지 않아. 우리에게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야.」

「당신을 사랑하고 싶어...」

「애초에 시작도 없었지. 과거가 없는데 미래가 존재할 성 싶은가?」

「있지, 스승님. 관용이 뭐라고 생각하나?」

「우리는 현재에 있어.」

「관용이란, 지금 스승님이 내게 주어야 할 것.」

「오래 전 내딛은 발에 감춰진 발자국을 상상하고 있지.」

「내가 말하는 관용은... 받아들여짐이다.」

 

  교정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나는 단숨에 도착했다. 해가 떠있을 때 달려왔는데, 벌써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나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내 눈으로 반드시 봐야만 했다. 한창 공연이 진행되고 있을 극장을 찾아, 굳게 닫힌 문을 밀었다. 나는 봐야만 했다. 주어진 역할을 완수해야만 했다.

  생각보다 문은 쉽게 열렸다. 애초에 잠그지도 않은 것 같다. 어두운 객석은 무대에서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에 의지해 간신히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나는 계단을 하나둘 내려와, 어두운 객석을 지나 무대 위에 올라섰다.

 

  무대 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두 사람의 흔적은 온데 간데 사라져있었다. 나는 무대 하수서부터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남자와 주인이 걸었을 그 길을 상상하며, 무대 중앙까지.

  넓은 극장이 자신의 발소리로 가득 찬다는 건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오히려 혼자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시선을 둘 수 있는 곳을 제한한다. 두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내리쬐는 조명이 뜨겁고, 무대 장치는 아직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고, 방금 전까지 누가 소리라도 지르고 있던 건지 미세한 파동이 남아있다. 관객이기에 보이는 게 있다. 그 무대 안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라, 밖에서 보는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는 게 있다.

죽음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발걸음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한다. 이 무대가 사람을 잡아먹은 것이다.

 

  이어서 현재, 나는 무대 정중앙에 서있다. 중앙에는 오래 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발자국이 향하는 곳은 남자와 주인이 걸었던 방향도, 그 반대 방향도 아닌 관객을 향해 있다. 객석 한 가운데, 낡아빠진 의자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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