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트리거를 유발 할 수 있는 소재가 사용 됐습니다. 주의 부탁 드립니다.
“니 또 어디 가는데? 미카!”
3교시가 시작하기 5분 남짓 남아있을 때쯤이었다. 걱정하듯이 자신을 바라보 며 소리치는 같은 반 아이를 뒤로 하고서 별다른 말 없이 씨익 웃어보였다. 빠 르게 학교 후문 쪽을 향해 뛰었다. 학교에 등교하기 전, 후문 앞에 자전거를 준비해 두었기 때문에 빠르게 도망칠 수 있을 터였다. 서둘러 자전거를 향해 달려갔다. 학교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분명 오늘도 그 아 이가 그 곳에 나타날 것이 분명했으니까. 숨을 겨우 내쉬며 핸들을 잡아 그대 로 자전거에 올라탔다. 이렇게까지 체력이 저질일 줄이야. 더운 초 여름의 강 한 햇빛 탓에 제대로 눈을 뜨기도 어려웠다. 다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서툴게 자전거의 폐달을 밟았다. 급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밟은 폐달에 자전거는 휘청거렸다. 어린 시절부터 수리 한번 맡기지 않고 오랜 세월을 함께했기에 닳 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세차게 폐달을 밟으며 그 곳으로 향했다.
시원한 바람을 맞았다. 학교에서 계곡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다. 촌 동 네라며 온갖 무시를 받던 지난 날들을 새까맣게 잊어버릴 만큼 경치가 운치있 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꽃잎이 살랑이며 흔들리는 것이 그 무엇 보다 아름다웠다. 어느새 나는 미소를 짓고 있었고, 초여름의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열심히 페달을 밟을 뿐이었다. 그 아이도 지금쯤 웃으며 그림을 그리 고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그 아이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내었다. 짧은 머리
칼이 바람에 날려 찰랑이고 있었고,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짓는 그 얼굴은- 아, 또 얼굴이 빨개졌다. 그는 어떠한 것들 보다도 가장 아름다웠다. 어떠한 생명 도, 예술적 가치가 있는 예술품마저도 그의 아름다움을 따라올 수 없으리라 굳 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를 처음만난 그 날을 잊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집에서 뛰쳐나와 갈 곳 없이 무작정 뛰쳐나왔던 그 날, 얕은 계곡의 맑은 물을 바라보며 울음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던 그 날에, 그를 만난 것은 어쩌면 운명 이었을지도 모른다. 쪼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는 혼자서 눈물을 훔치 고 있었을 때였다. 무언가 기척이 느껴져 그대로 위를 올려다 보았을 때, 어딘 가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했다. 바보같은 나의 표정 을 보고도 그는 나를 비웃지 않았다. 기분 나쁘게 생긴 눈이라며 조롱하지도 않았다.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앉아 나의 눈치를 살피고는 들고 있던 노트와 연필 한 자루를 꺼내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가 아무 말 없이 그림을 그리 자, 나도 모르게 어느새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사각사각 연필 소 리와, 나뭇잎이 바람에 살랑이는 소리… 눈을 다시 뜨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예쁜 눈을 가졌네, 보랏빛의 맑은 눈.
“…다 울었어?”그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빨개진 눈가를 바라보며 나름 저를 신경 써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를, 왜? 아무리 친절한 사람이라 한들 처음보는 낯선, 그것도 기분 나쁜 짝짝이의 눈을 가진 사람에게 말을 건네며 걱정하는 이는 극히 드물다. 그런 의문을 품은 채 그를 경계했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지금, 도와주려는 사람 앞에서 이따위 생각 을 가지며 의심할 여유까지는 없었다. 기운없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그에게 답 했다. “응, 지금은 괘않타. 걱정해줘가 고맙데이, 니 윽시 착하네?” 애써 나쁜 감정을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두고 환하게 웃었다. 그런 나의 반응에 조금은 안심한 듯 그는 다시 자신의 그림에 시선을 돌렸다.
멍하니 계곡의 물이 흐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몇분이 지났을까, 눈치를 살피다 그에게 뭐라도 말을 붙일 구실을 찾았다. “니 그림 그리나? 뭐 그리는 데?” 그의 노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넌지시 물어보았다. “별 거 아니야, 그냥, 취미로…” 그는 한 손으로 꼬옥 잡고 있던 노트를 황급히 숨기며 말을 흐렸다.
어딘가 자신 없어보이는 듯한 눈빛이,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런 실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왜? 알 수 없는 감정을 겨우 억눌렀다. 순간 어색하게 일그러진 나의 표정에 그는 의문을 가진 듯이 보였다. 숨이 막혀오는 정적에 재빠르게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아무 말도 안 할테니까는 그림 좀 보여도! 내 진짜 한마디도 안하께.” 내 표정이 꽤나 바보같았는지 그는 픽- 웃으며 마지 못해 노트를 나에게 넘겨주었다. 한 장 한 장 소중하게 넘겨본 노트 속에는 대 부분 우리 동네 풍경을 그린 그림들이었다. 계곡 길을 오고 가다 마주치던 연 못의 물레방아, 논 밭을 일구러 걸음을 옮기는 이웃 할머니, 따스한 햇살 아래 만발한 꽃밭… 그저 그림일 뿐인데도, 그가 그린 그림 속 우리 동네는 영화에 서나 나올 법한 낭만적인 곳으로 비추어지게 하였다.
바쁘게 살아가는 시간 속 그 찰나에, 그는 단 몇 초간의 아름다움도 놓치지 않 았다. 그의 그림을 멍하니 감상하고 있던 순간, 그는 바보같은 표정 하지 말고 어서 내놓으라며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운가, 이런 실력이. 아무 말 없이 다시 그의 노트를 돌려주었다. …나도 저 사람처럼, 그리고 싶다. 작은 소망이 생겼 다. 뜸을 들이다, 그에게 물었다. “혹, 혹시 실례가 안된다 카믄, 내도… 그림, 배울 수 있나? 니한테.” 민망함에 괜히 딴청을 피우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 다. 거절하겠지, 오늘 처음 본 기분 나쁜 녀석을 받아줄리는 없고. 정적이 흘 렀다. 숨막히듯 조용한 이 정적에 당장이라도 미안하다고 외치고는 도망치고 싶었다. 역시 너무 말도 안되는 부탁이야. 어색함에 땅만 보던 고개를 들어 그 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러다, 그의 입술이 달싹이며 말을 꺼냈다.
“그렇지만 우리, 서로 이름도 모르는데.” 아, 이름. “미안타.. 내 감탄이 먼저 나와가…” 멋쩍게 웃으며 이름을 말했다. “내는 카게히라 미카다.” 손을 내밀 며 웃었다. 그 아이는 내 손을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잡고 악수를 하였다. 그 리고는 “나는 이츠키, 이츠키 슈야.” 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윽시 예쁘네.” 슈, 어쩜 그렇게 이름도 아름다울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 말에 그는 당황한 얼굴로 헤픈 소리를 잘도 한다며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나 귓가에 들리지 않았 다. 잘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그를 바라보며 손을 계속 붙잡아 놓지 않았다. 물론 무의식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당황하며 손을 떼려는 그의 손짓에 정신을 차려 손을 놓아주었다. “근데, 내 니는 학교에서 본 적이 없는디. 혹시… 형, 형이라거나?” 이제껏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은 것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무슨 그림을 배우겠다고… 소심하게 물어본 나의 질문에 슈는 피식 웃으며 나와 같은 나이라고 말했다.
“니 내 나이는 어떻게 아는데?” 나의 질문에 그는 아무 말 없이 나를 가리켰 다. 정확히는 나의 교복 셔츠에 달린 명찰을 가리켰지만. 이 동네 주변에 고등 학교는 하나 뿐이었고, 쨍한 노란색 명찰이 이제야 제 눈에 띄었다. 아, 명찰 색이. 창피함에 차마 슈를 바라볼 수 없었다. 계속해서 바보같은 행동만 골라 서 하고 있었고, 더 이상 그의 앞에서 이상한 모습을 보이긴 싫었다. 정신 똑 바로 차리자, 라고 다짐하며 그에게 “매일 이 시간에 여기에서 만나자, 내 매 일 찾아오께!” 라고 말한 채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무언가 불만이 많아 보 이는 얼굴이었지만 지금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다시 그의 만남을 생각하니 얼굴은 금새 화끈거리고 급기야 숨이 가빠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이 런 게, 첫눈에 반한다는- 내가 왜 이러지, 정말! 화끈거리는 몸을 겨우 진정시 킨 채 이불 솓에 파묻혀 그를 지웠다. ..정확히는, 지워내려는 시도를 했다. 그 러나 그는 내 머릿속부터 꿈을 꾸는 순간까지도 내 주위를 맴돌았다.
*
그 다음날, 학교를 마치자마자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었다. 이틀째 학교에 빠지기에는 담임 선생님의 감시가 삼엄했기에, 수업을 빠짐없이 다 들을 수 밖 에 없었다.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을 참고 끝나기만을 기다려 빠르 게 달려가고 있는 것이었다. 오늘, 있을까. 막무가내로 부탁을 하고 달려나온 것이기에 사실 그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 늘도… 혹시나, 라는 기대감에 달려갔다. 그리고, 그 날도 그를 볼 수 있었다. 그림 그리는 것에 집중하여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듯 하였다. 그것보다 그가 정말 자신의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것에 설레었다. 슈, 슈의 곁에서 함께 그림 을 그리고, 같이… 그의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왔네? 내 막무가내로 부탁 해가 안 올줄 알았다.” 머쓱하게 그를 향해 웃었다. 그는 정말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에게 말했다. “애초에 네가 대답도 듣지 않고 가버렸잖아? 난 아직 너에 게 그림을 가르쳐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 생각해보니, 정말 그랬다. 난처 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부르는 그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어쩔 줄을 몰랐다. 고개를 연신 숙이며 사과하는 나의 모습에 그는 시선을 돌린 채 여러 번 사과
할 필요는 없다며 마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흥, 이런 시골 마을에서 나 같은 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 라며 어색하게 웃음 을 지었다. 뭘까, 저번과는 다른 반응. 분명 자신감이 없는 말투였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무언가, 꾸며낸듯한. 자신의 그림에 대한 자부심을 내보인 것 이 처음인 것처럼 어색했다. 하지만 그 어색한 웃음마저도 내 가슴을 쿡 찌르 듯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그래, 내 영광이라 생각하고 있다! 내 너한테 배우 려고 이것저것 가져왔는디, 그게..” 가방을 뒤적이며 공책 하나와 필통을 꺼내 었다. 공책을 펼치고, 필통 속에서 연필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슈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하더니, 이내 머리를 짚고 중얼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나의 물음에 그는 “..네가 가져온 물건에 대해서 지적을 하려 했지만 배우는 데에는 문제가 없으니까, 넘어가기로 했다는 거야.” 라며 내가 연필을 쥐는 것 을 바로 잡도록 하였다.
“일단, 눈 앞에 보이는 것을 천천히 그려보도록 해. 무엇이든 상관 없으니까, 아무거나 눈에 보이는 것 부터 그려봐.” 그의 말에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 책의 여백만을 바라보았다. 당장 눈 앞의 것은 둘이서 앉아있는 들판, 그 앞에 펼쳐진 계곡, 계곡 너머에 있는 먼 곳에 위치한 큰 산… 눈에 보이는 것 부터 그리라는 그 말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제 손이 분주히 움직이지 않자, 슈는 덧 붙였다. “잘 그리지 못해도 괜찮으니, 크게 보지 말고 주변을 자세히 관찰해 봐. 사소한 것이라도 좋아, 설령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먼저 주위를 잘 둘러 보도록 해.” 그를 바라보던 시선을 돌려 주위의 것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향 기로운 꽃내음에 주변을 살펴보니, 아름다운 꽃들이 보였다. 이름은 알 수 없 지만, 아름다운 하얀 꽃이었다. 자신은 없었지만, 마땅히 그릴 것이 없었기에 꽃 한 송이를 보며 손을 움직였다. 어색하지만, 옆에서 집중하며 분주하게 그 리는 그를 보며 덩달아 의욕이 생겼다. …칭찬받고 싶어. 막연하게 생각하기만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눈 앞에 있는 아름다운 꽃을 집중하여 바라 보았다. 그러다 문득 아무도 없는 것 같은 침묵에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니, 입가에 미소가 베어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 한없이 아름다웠다. 선선하게 부는 바람에 그의 머리칼이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 바람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 지작거리며 고민하고, 신중하게 선을 긋는 그를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버 렸다. 무방비한 미소, 남에게도 쉽게 보여주는 걸까. …자주 보는 이에게는 더 많이 보여주겠지. 나만 보고 싶어. 남에게 저런 미소를 함부로 보여주지 말아
줘.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집중을 한 것인지 그의 입가에 미소는 사라져버렸다. 아, 없어졌다. …조금만 더, 보고싶은데. 괜히 울컥한 마 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만난지 얼 마 되지도 않은 사람한테 이런, 이런 역겨운 감정을 느껴도 되는 걸까. 순수한 사랑이라기엔 뭔가 달랐다. 이건, 이 감정은… 그렇게 혼자 감정을 삼키고 있 을 때, 어느새 눈 앞에 저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만 깜짝 놀라 힉-! 하고 소리를 내어버렸다.
“잡생각은 버리고 그림에 집중해.” 그의 말에 다시 연필을 꽉 쥐고 그림을 그 렸다. 이런 생각, 위험해.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리는 기분이었다. 불순한 마음 갖지마, 원래의 목적은 이게 아니잖아. 그림을 그리는 게 목적이잖아.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다시 그림에 집중하여 그렸다.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은 더할나 위 없이 행복한 기억이었다. 서투른 실력으로 그린 그림을 그에게 보여주니, 그는 아직 배울 게 많을 것이라며 다시 웃어보였다. 그 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그의 예쁜 미소, 하얀 손, 나를 바라보던 눈… 모든 것이 아름다운 기억이었 다. 그러나 그 행복은, 미치 내게는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 듯 오래 가지 못했다.
*
그렇게 슈와 만나서 그림을 그린 지 어느덧 두어 달쯤이었을 때였다. 폐달을 밟아 계곡 근처에 다다라 달려가는 길이었다. 가방 끈을 꽈악 잡으며 달려가 어느새 계곡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슈는,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평소처럼 매일 가지고 다니던 공책과, 연필 한 자루.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계곡 가의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했다. 알 수 없는 복잡한 눈 에 나도 덩달아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금새 정신을 차리고는 평소처럼 그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와 오늘은 빈 손인 기가, 이츠키 군? 내 가르쳐 주기로 하지 않았나~!” 그러나 그는 웃지 않았다. 나의 말에 반기지도 않았고, 대답조 차 하지 않았다. 초점을 잃은 눈이 저를 바라보지도 못한 채 허공을 맴돌았다. 무언가 뒤틀린 기분이었다. 왜, 갑자기 웃지 않아? 나를 향해, 웃어줘. 그의 경직된 태도에 무어라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그를 향한 걱정이 앞섰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도대체 왜, 언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났었다. 매일 이 시
간, 서로를 기다렸었으니까. 그치만 여태까지 나를 향해 경직된 상태로 어딘가 넋이 나간 듯한 그는 처음이었다.
“이츠키 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기가?”
“…아무 일도 없어. 괜찮으니 그런 표정은 짓지 마, 썩 보기 좋은 표정은 아니 라는 거야.”
“괜찮은 표정이 아이다, 이츠키 군. ..내한테, 말해줄 수 없겠나?”
나의 말에 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꽤나 담담하게 말했 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을 거야. …아무것도.”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니, 아니, 무리라는 건? 이해할 수 없었다. 복잡했다. …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거야? 나의 표정을 본 그는 덧붙여 말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너를, 너와 함께-
“정신 차려, 이제 내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거야?”
“아, 아이다. 미안타. 무리라는 건… 더 이상, 내랑 만날 수 없다는 기가? 지 금처럼, 이렇게.. 이 곳에서..”
말을 더듬는 날 보며 그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라며 한숨을 쉬었다. “이 곳에서 만나는 것 말고도 다른 방법도 많잖아? 그저 그림을 그만두는 것 뿐이니까, 계속 이 곳에서 만날 수 있어.”
빠르게 요동치던 심장이 그의 말 한마디에 금새 가라앉았다. …계속 만날 수 있어. 그렇지만 의문이 들었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니, 어째서? 그 림을 그릴 때 누구보다 행복해보인 사람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순간, 어느 때 보다 더 찬란히 빛이 나는 그였는데, 그런 그가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했다. …갑자기 왜 그리지 않겠다는 긴데? 나의 물음에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나의 눈을 응시하며 말했다. “…감수해야할 것이 너무 많아. 허상에 갇혀 꿈만 꾸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지. ..그런 바보는 되기 싫으니까.”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의 반응에 그는 깊이 알 필요도 없다고 덧붙 였다. “그냥, 친구처럼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목적없는 만남도 때로는 즐거울 때가 있지. 그런 경험도 나쁘지 않아.” 어딘가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어딘가 몸이 아릿했다. 슬픈 표정, 그런 표정은 싫어. 물 론 그는 여전히 아름다웠으나, 그가 슬퍼하는 건 싫었다. 나를 향해 웃어줘. 나와 함께 있는 모든 순간을 행복하고 소중하게 여겨줘. 욕심이 났다. 그의 슬 픔에 같이 비애를 느끼는 것이 바보 같았다. 그러나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그의 곁에 남아 그의 말을 들어주는 것. 그것만이 내 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음을.
“…학교는 다니지 않고 있어. 부모의 뜻으로 집에서 모든 공부를 하게 되었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점점, 감시를 받는 기분이 들었어.”
“…어쩐지, 처음보는 얼굴이여가 놀랐다 아이가?”
“외출을 하는 것조차도 힘들었으니까. 모든 것을 완벽히 준비해서 남들에게 흠 잡을 곳 하나 없는 완벽한 아들이 되어야 했어.”
그는 어딘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입은 웃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주었지 만 눈빛은 어딘가 처연했다. 다시 기억하기에도 끔찍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 며 말을 이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그들에게 들켰던 날, 내 그림을 전부 찢어버렸어. 남들에 게 보여주지 못할 형편없는 작품이라며 쓰레기통에 쳐박아버리더군. 완벽한 그 림을 그리지 못할 것이라면 아예 그리지 말라는 말도 했어. …그리고 어젯밤, 항상 들고다니던 그 공책을 뺏겨버렸어.”
“..그래서 오늘, 그림을 더 이상 그리지 못한다는 말이…”
“그래, 철저히 감시 당하고 있어. …숨이 막힐 듯이 말이야. 다시는 그림을 그
릴 생각은 하지도 말라며 소리를 치더라고. …처음으로 부모에게 혐오감을 느 꼈어. 나를 무슨 볼품없는 인형 다루듯 굴더군. 그렇지만 그런 동시에, 내 실 력에도 확신이 서지를 않았어. 어쩌면 재능이 없었던 걸지도 모르지.”
그의 말에 무어라 말을 붙일 수 없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 었다. 먼 풍경을 바라보는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뱉고서 나도 모르게 그를 안아버렸다.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게 미안해서, 따뜻한 온기를 나누었 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무 말도 못해줘가 미안하데이. …내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누가 뭐라 캐도 내는, 이츠키 군 그림이 세상에서 제일 멋지다. 기래서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 거고. 이츠키 군의 그림은 반짝반짝 빛나는, 제일 멋진 그림이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눈물이 흘렀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안아주는 것밖에 없는 주제라는 게 분했다. 내가 우 는 것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그는 머뭇거리다 도리어 내 머리를 감싸 안아 쓰다듬으며 괜찮다 말해주었다. 거짓말, 괜찮지 않잖아. 위로를 당하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이러면 안되는데… 이상하게도 그에게 안긴 채 온기를 나누는 것 이 나에게 큰 안정을 주었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눈물을 닦아내며 서로 어색하게 나란히 앉아있을 뿐 이었다. 바보같이 거기서 왜 울어가지고는…! 어색한 적막에 어쩔 줄을 몰랐 다. 그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 또한 꽤나 민망했던 건지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적 속에서 내가 먼저 말을 꺼내었다. “그,
오늘 가져온 게 있는디, 별 건 아이고…” 말을 흐리는 내 모습에 슈는 의아해 했다. 가방에 고이 넣어둔 종이 한 장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그는 종이를 펼쳐보였다.
“이건…”
“헤헤, 내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림 그리는 모습이 예뻐가 그려주고 싶었데 이. 이제 그 모습을 볼 수는 없겠지만… 캐도, 소중하게 간직해줬으믄 좋겠 다.”
웃으며 그림을 건네자 그는 그림을 보고서 아무 말이 없었다. 무언가 복잡해보 이는 표정이었다. 고맙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대화는 어색하게 마무리되었다.
…실수한 건가. 다 그만두겠다는 사람 앞에서, 이런 그림은…
그는 그림을 감상하듯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저의 눈에 그에게 붙은 먼지가 신경쓰였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그에게 다가가 먼지를 떼어주는 순 간, 그가 손에 쥐던 그림을 놓친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당황한 채 서로를 응 시하고 있을 때, 그림은 순식간에 바람에 날려 계곡의 옅은 물 위로 떠다녔다. 나를 보던 그의 눈빛은 계곡 위에 떠다니는 그림 쪽을 응시했다. 그가 넋이 나 간 것처럼 그림 쪽을 바라보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 그림이 날라가버 렸네, 괘않타! 내 다시 그려줄 수도 있으니까는…!” 나의 말이 들리지 않는 것 인지 그는 아무 말 없이 계곡으로 향했다. 바로 앞에서 옷 소매를 걷는 것을 보며 그를 따라 같이 옷 소매를 걷었다. 내가 가져오겠다는 말에도 그는 자신 이 가져올 수 있다며 도리어 나를 말렸다. 결국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말다툼에 같이 들어가 종이를 건져내었다.
“응아아, 다 젖어버렸다 아이가… 내 다시 새로 그려주께.”
“됐어, 말리면 조금은 돌아올테니까. …너에게 받은 첫 그림이기도 하고 말이 야.”
그의 수줍은 말에 활짝 웃으며 고맙다는 말과 함께 그를 껴안았다. 그는 내 손 에 뭍은 물이 차갑다며 당장 떨어지라 소리 쳤지만, 입가에 미소는 여전히 남 아있었다. 서로 웃으며 계곡 물에 나와 들판에 앉아 그림이 마르기를 기다렸
다. 서로를 웃으며 바라보고 있을 때, 문득 손에 젖은 그의 하얀 손이 제 시야 에 들어왔다. 정말 바보 같은 짓인 걸 알면서도,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정 말 아무 생각 없이 잡은 것이었다. 차갑고도 새하얀 손이 제 손에 잡혔다. … 손 마디 마디 뼈가 느껴질 정도로 앙상했다.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아버리니,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서는 갑자기 왜 손을 잡는 것이냐며 언성을 높였다.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한 손으 로 얼굴을 가리고, 귀는 새빨개져 당장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 반응, 뭐 지? 처음 보는 그의 삐걱거림에 손에 더 힘을 주어 잡았다. “저기, 이츠키 군? 지금 귀가 엄청 빨개져가 가려도 다 보인데이?” 나의 말에 그는 얼굴을 가리 던 손을 치우고는 여전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한 채 말했다. “갑, 갑자기 난데 없이 손을 잡는 이유가 뭐야? 무례하기 짝이 없군, 정말… 최악이라는 거야!” 그의 반응에 많은 생각이 뒤죽박죽 섞였다. 분명, 부끄러워 하는 것이다. 그런 데, 왜? …쓸데없는 희망이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설마 그도 나를, 이런 감정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라면? 정말 그렇다면, 언제부터, 아니, 그럴리는 없지. 손을 떼어버리고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었다. “흥,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놀랐을 뿐이야. …괜한 생각은 하지 마.” 썩 좋은 말이 아니었음에도 가슴이 괜히 두근거렸다. 분명, 그 반응은… 덩달아 새빨개지는 얼굴에 괜히 이상한 생각 말라며 잔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나만 이런 감정을 느낀 것은 아닐 것이 라 확신했다. 그의 새빨간 귓가가 다시 아른거렸다. “…칫, 오늘은 일찍 들어 가야겠어.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거야!” 서둘러 돌아가려는 그의 뒷모습에 다급 하게 일어나 그를 따라 일어섰다. “내, 내일도 보는 기다? 응?” 그는 나의 말 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었다.
*
그 후로 그를 만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려 미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서로 어 색한 분위기 속에서 그 설렘을 즐기며 대화하기를 반복하던 중이었다. 이츠키 에게 말해버리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좀 더 진지한 관계가 되고 싶다고, 사랑 한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겁이 났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착각이 면, 그래서 이 모든 관계가 망가져버리는 게 두려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이츠키 슈는 갑자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정말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바로 전 날까지도 그는 나에게 밝게 웃어주었다. 손을 잡아도 화를 내지 않았고, 새빨개진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린지 하루, 이틀, 일주일이 지나도 그는 아 무런 소식도 없었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단지 사정이 생긴 것이라 믿고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조급해졌다. 별다른 연락망도 없었다. 그의 집이 어디인지 조차도 몰랐다. 비참했다. 그를 사랑한다고 확신했으면서, 정작 그와 관련된 것은 뭐 하나 아는 것이 없었다. 눈물이 차올랐다.
그 날도 어김없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무언가 좀 달랐다. 익숙한 물 건이 눈 앞에 보였다. 그의 공책이었다. 분명, 뺏겼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공책을 펼쳐 넘겨보았다. 전에 봐왔던 그림들도 남아있었다. …여전히 아름다 운 그림이야. 그렇게 넘기고 넘겨서 마지막 장에 도달했을 때, 그가 쓴 것만 같은 필체의 글을 발견했다.
8월 19일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을 들켜 몇번을 맞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지금 이 일기를 쓰는 순간 조차도 빰이 아려온다. 여전히 나의 그림은 인정받지 못했으나,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생겼다. 그 아이는 나를 좋아해주 었다. 진심으로 위로해주었고, 함께 그림을 그려주었다. 그 아이를 만나 함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만날 수 없다. 아버지 란 작자는 외출에도 제한을 두고 24시간 내내 나를 감시하였다. 여러번 나가 기를 시도했지만 나갈 수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분했 다. 다른 건 바라지 않았다. 이젠 그저 그 아이를 만나고 싶었다. …카게히라 를 만나고 싶다.
8월 27일
더 이상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방 안에 갇혀 간섭받으며 인형처럼 움직이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카게히라는 나를 잊었을 까. 아직도 그 곳에서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잊어버리고는 나를 잊었을 수도 있겠지. 이제는, 모르겠다. 아무런 의욕도 들지 않는다. 그저 조금 이라도 쉬고 싶다.
일기는 두 장 뿐이었다. 계속해서 넘기자, 무언가 다급하게 써 내려간 것 처 럼 휘갈긴 글이 있었다. 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카게히라에게.
부디 이 편지를 네게 전하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라. 우선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어. 아버지는 날 계속 가둬놓을 셈인 것 같더군.
곧 내 방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폐기해버리겠다며 나갔어. 어쩌면, 널 더 이상 볼 수 없을 것 같아.
먼 곳으로 떠나게 되었어.
아마 그 곳에서도 부모의 감시를 받으며 살아가겠지.
…카게히라, 정말 너를 너무나도 보고 싶어.
한번이라도 다시 만나고 싶어서, 너도 아직까지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항상 만나던, 그래.
네가 편지를 읽고 있는 그 곳에서 만나자.
이 편지를 읽은 다음 날, 반드시 나가도록 할게. 보고싶어.
꼭, 다시 보자.
다음 날, 다음 날에 그를 다시 만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다음은? 머리가 복 잡했다.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단 한번 뿐이라면, 그건 싫었다. 그러나 욕심을 내서는 안된다. 내일, 그를 만나서… 아무렇지 않은 척 작별하고 와야 해. … 할 수 있다. 그를 위해서라면, 여기서, 잘 끝내는 게-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 체하지 못했다. 편지 위로 눈물이 흐르며 조금씩 젖어들어갔다. 어떻게 괜찮을 수가 있겠어, 막연했다. 공책을 품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몇 번이고 공책을 들여다보며 괴로워했다. 괜찮은 척 할 수 있을까. …다시 그를 보지 않을 자신 이 없다.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오늘, 그를 만난 다. 긴장이 되어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넋이 나간 채 아 무것도 하지 못했다. 수업을 모두 마치고 나서야 실감이 났다. 이제, 그를 만 난다. 괜히 조급해지는 마음에 빠르게 뛰어갔다. 그러나 가까우면 가까워질 수 록 걸음을 천천히 하게 되었다. …무서워. 그는,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아 니, 애초에 미리 와 있을까. 천천히 걸어가 어느덧 계곡 앞에 도착했을 때, 익 숙한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야, 카게히라.”
“…이츠키 군? 정말, 정말 온 기가?”
눈 앞에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그가, 그가 내 눈 앞에 있다. 조금은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반기는 그가, 정말 내 앞에… 천천히 다가가 그의 양 볼을 잡았 다. 차가워. 그는 “반가운 건 알겠으니 볼을 잡는 건 그만둬.” 라며 어색하게 웃었다. 얼굴이 수척했다. 안그래도 마른 몸이 더 앙상해지고, 눈가에는 다크 서클이 심각했다. 그를 품에 안고 보고 싶었다고 속삭였다. 그는 내 등을 토닥 이며 말했다. “나도 보고싶었어, 아주 많이.” 그는 내가 진정하기 까지를 기다 리다, 나의 손을 잡고서는 갈 곳이 있다며 나를 끌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말 도 없이 어디 가는 긴데?” 나의 물음에 그는 가보면 알 것이라며 싱긋 웃었 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를 버스를 타고 나란히 앉았다.
그는 창가 자리에 앉아 풍경을 보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아름 다운 그의 모습은, 정말 단 일초도 놓칠 수 없어서, 다시 그를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다시 나를 괴롭혔다. 너는 뭐가 그렇게 행복할까, 웃고 있는 그의 모습 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아름다웠으니, 그의 손을 꼭 잡고 도착 하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채 버스를 타고 도착한 곳은, 바닷가였다. 그는 여전히 내 손을 잡고서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 았다. 같이 앉아 파도를 감상했다. 그는 가방 속에서 무언가를 찾는 듯 뒤적이 다, 카메라 하나를 꺼냈다. 폴라로이드 카메라였다. 그는 카메라를 만지작대며 “사진 하나라도 남기면 좋을테니까.” 그는 나를 향해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내 몸이 굳어있자, 그는 표정 좀 풀어보라며 싱긋 웃었다. 그의 미소에 조금은
경직된 표정이 풀리던 그 때, 카메라 셔터음이 울리고 폴라로이드가 뽑혔다. 사진이 보이는 순간, 바보같은 표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사진을 보며 우리 는 소리내어 웃었다. “둘이 찍을 수 있으믄 좋을텐디… 잠깐 기다려봐라!” 주 위를 둘러보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부탁한 뒤 바닷가 앞에 나란히 섰 다. 그는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고, 나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노을이 진 바닷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은 정말,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그렇게 두세 장을 뽑아 사진이 보이기를 기다리며 웃고, 사진을 보면서 또 웃었다.
“이렇게 사진이 있으면, 더 이상 보지 못해도 추억할 수 있으니까.” “…우리, 더 이상 만날 수 없나?”
“..그래,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아.”
“그, 그라믄 연락이라도 하믄 되지 않나? 전화번호를-”
“아니, 그럴 수 없어. …멀리 떠나서, 그 곳은 연락도 닿지 않을 거야.”
그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뭐라도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떠날 거 면 도대체 왜 나에게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따지고 싶었다. 가지 말라고 붙잡 고도 싶었고, 다 괜찮을 거라고 위로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의 곁에 남아 평생을 지켜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 그는, 당장 멀 리 떠나야 할 테니까.
“…그럼 여태까지 내한테, 내한테 와 그랬는데. 내 혼자 착각한 거 였나? 혼 자, 바보같이..”
“아니야, 나도 너를, 너를 진심으로… 좋아해, 아니 사랑해. 그렇지만, 네가 나 한테… 나에게 네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으면 해. 그냥, 나를 잊고-”
“이츠키, 아니, 슈 군은 내를 잊는 게 가능한 기가? 쉽게 잊을 수 있는 기면, 내 지금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다. 이렇게 바보같이, 여기까지 와서 슈 군이랑
이러고 있지는 않았을 기다.” “…카게히라.”
“내를 바보로 아나본데, 내는 그냥 쉽게 잊을 수 있는 사람이랑 이렇게 바닷가 오지도 않는다. 슈 군이 뭔데, 내가 슈 군이랑 쓰는 시간을 할애한다고 표현하 는데?”
눈물이 차오르다 못해 몸은 금새 뜨거워졌다. 그동안 너는 나를, 얼마나-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하고 눈물을 흘리는 나를 보며 그는 다가오기를 주저했다.
“…너에게 상처를 줄 의도는 없었어. 너에게 진심이 아니었던 적도 없다는 거 다! …마지막인 만큼 너에게 좋은 기억만 선물하고 싶었어. 너의 곁에 남을 수 가 없다면,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으로라도 마무리하고 싶어서, 그래서…”
고개를 떨군 채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분노를 느꼈다. 그에 대한 분노가 아니 었다. 그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무능함. 그리고 그 분노를 사랑하는 이에게 해소하고 있다는 스스 로의 어리석음에. 이제는 지쳐버렸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지금 그를 웃으며 떠나보내는 것뿐이었다.
“…미안타. 내 잠깐, 흥분해가. 슈 군, 우리 좋은 추억으로 만들어야제. 그제? 마지막 만남이 이라믄 안된다 안카나. …우리, 웃으믄서 끝내자.”
“....정말 미안해, 카게히라.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어. 미안해, 정말…” “아이다. ..시간이 마이 늦었데이, 가자.”
그와 떨어져 걷는다. 이제 손을 잡을 수도, 웃으며 함께 대화를 나눌 수도 없 었다. 더 정이 들어버리면, 더 깊은 사랑에 빠져버리면, 정말 그에게 안녕을 말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서로 다른 버스를 타기 전, 그에게 인사했다.
“…잘 지내라. 건강 잘 챙기고.”
나의 말의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가방 속에서 폴라로이드와 접혀진 종이 하나를 내게 건내었다. 전에 네가 내게 주었던 그림, 아버지 때문에 더 이상 보관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그는 담담한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그러나 손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그것들을 받아 주머니에 넣었다. 서로를 바라보았 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그러나 내가 타야 할 버스가 도착했고, 나는 버스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안녕, 미카. …고마웠어.”
나는 차마 그 말에 무어라 답할 수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버 스의 문이 닫히고, 그는 창가자리에 앉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손을 흔 들었다. 버스는 출발했고, 그렇게 그의 모습도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문득 그가 건내주었던 것이 생각나 종이를 꺼내어 펼쳤다. 내가 그에게 선물했 던 그림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린, 소중한 그림이었다. …그 그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 종이 구석에 눈에 띄는 짧은 글이 시야에 들어 왔다. 그가 적은 글이었다.
미카, 나에게 사랑을 가르쳐줘서 고마워. 내가 없어도 슬퍼하지 말아줘.
부디 나를 잊고 살아가기를.
그리고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기를. 사랑해.
- 이츠키 슈.
*
미카.
또 너였다. 같은 바닷가에, 같은 옷을 입고, 넌 여전히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미소를 지었다. 환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미소. 나는 그런 너를 계속 응시했다.
바다를 볼래? 내가 있어.
그의 말에 바다를 응시하니, 발을 물에 담군 채 나에게 활짝 웃어주는 슈가 있 었다. 그는 웃으며 나에게 이리 오라는 듯 두 팔을 벌리고 있었고, 나는 그에 게 달려갔다. 그러나 이상했다. 가까이 다가가도, 그는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아무리 두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아 보려고 해도 그는 닿지 않았다. 슈 군, 가지 마. 떠나지 마. 점점 물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신경 쓸 겨를 은 없었다. 내 앞에, 슈가 있어. 점점 깊어지는 물에도 슈는 뚜렷하게 보였다. 조금만 더, 그래. 같이 가자. 슈의 말에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다.
점점 감각이 없어지고,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숨이 막혀왔다. 몸이 점점 가라앉는다. 눈 앞에 슈가 보였다. 그러나 눈이 감겼다.
다시 만났네, 우리.
바다에 가라앉는 그 순간에도, 그의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환영인 건가. 아 무래도 좋았다. 곁에 그가 있어, 알 수 있었다. 이대로,
어디서부터가 허상이었을까. 어쩌면, 이 모든 것들이. 아니야, 허상이라도 좋았다.
이제 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긴 꿈을 꾸었다.
-외전
버스를 타는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 래, 이렇게 끝날 거라는 거,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뒤이어 오는 버스를 탔다. 사진 한 장을 손에 쥐고서 집으로 도착했다. 집 안은 난리였다. 깨진 화병과 액자들, 유리 조각이 가득했다. 정말 지옥같아. 이렇게 분풀이를 해버리고서는 밖에 나간 것 같았다. 아버지, 아버지란 사람은 멍청했다. 그는 화를 참는 방 법이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몰상식한 사람이었다. 씻고 나온 뒤 수건으로 머리 를 털었다. 바닥에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평소였다면 짜증을 내며 정리했겠지 만, 곧 죽을 사람이 이런 걸 신경 써서 뭐 하나 싶었다. 드라이기를 꺼내 거울 을 바라보며 머리를 말렸다. 거울 속의 나는, 꽤나 침착해 보였다. 머리를 다 말리고서는 코드를 뽑아 드라이기를 천장에 걸어 묶었다. 옷매무새를 정돈했 다. 의자 위로 올라갔다. 목을 매달고, 의자에서 발을 떼었다.
그 순간, 문득 너와 함께 찍은 사진이 생각났다. 바보같이 나온 사진이었다. 나는 어색하게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는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 었다. 그러나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다시 만나는 날이 있다면, 너는 카메 라를 응시하고 웃어줬을까?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너. 행복한 표정으로 웃고있 는 나. 다시 돌아갈 수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