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ternal Wedding
w.샄레슈
*Trigger Warning*
*트라우마를 유발할 수 있는 요소가 존재합니다. 주의해서 감상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때의 청춘,
그때의 행복,
그때의 웃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의 추억은 꽃잎이 아스라이 떨어지듯. 그렇게 애틋하게, 조심스럽게, 나의 삶에 떨어지고 말았다.
∙ ∙ ∙
그날은 카게히라 미카와 이츠키 슈. 두 사람이 만난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츠키 슈가 프랑스에서 오랜 공부를 끝내고 마침내 일본으로 귀환하여 다시 함께 무대를 지배하고, 관객들을 사로잡고, 세계를 저들의 색으로 물들이며 각자의 세계관을 완벽히 펼쳐냈던 지난날들. 그리고 그런 날들을 함께 보내며 서로에게 말할 수 없는 마음을 품고 있던 날들. 끝내 어느 하나가 꾹 참고 있던 상대의 모든 마음을 알아챈 순간부터 이루어진 몽글몽글한 사이. 보이지 않는, 절대로 끊이지 않을 실이 이어진 고리를 얇은 손가락에 끼워 비로소 사랑의 증표를.
한때는 동경이었다. 애증이었을지도, 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 단순한 호감이었고 가족 같은 사랑일 거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변해가는 그 마음을 쉽사리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파트너였고, 스승과 제자의 사이였기에. 자신이 가진 이 마음을 부정하고 멀리 보내려고 했다. 하지만 부정은 서서히 심장을 깊숙이 파고들었고, 가장 아픈 곳을 찔러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마음을 부정하면서부터 그 사람의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자꾸만 피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자꾸만 눈물이 새어 나왔다.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그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코끝이 찡하곤 고통을 유발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서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지금 저 사람을 사랑하고 있다고.
존경도 착각도 아닌, 사랑이라고.
사랑을 인정하고 나서는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를 필히 사랑하고 있음에도 자꾸만 멀리하고 싶었다. 그가 나의 마음을 알아채고 나서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감정을 죽이고 마음을 감추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방법을 찾는 것은, 아주 험난하고도 막막했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쪼아보아도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가장 힘들었던 것은, 그가 자신을 피한다는 것이었다. 그를 멀리하고 싶었지만 동시에 보고 싶고 만나고 싶었다. 장정 1년이라는 시간의 대부분을 만나지 못하고 지냈다. 전화로 듣는 목소리와 사진, 가끔 만나는 것으로는 소용이 없었다. 추잡한 욕구는 그것이 상대를 방해한다는 것을 이미 충분히 알고 있음에도 계속해서 뛰쳐나오려고 했다. 잠에 들려고 할 때마다 계속해서 그가 내 꿈에 나타났다. 꿈에서 그는 늘 웃으며 내게 말을 걸어주었다. 평소와는 다른 따스한 손길로 나의 손을 잡아줬다.
따스한 손길. 꿈이라면 그것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감각일 텐데. 그리 생각하며 눈을 뜨면 제 앞에 흐릿하게 보이는 형체. 분홍머리의 그 사람은 나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 약하게 쥐고서 멍하니 나의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 은은하게 빛나는 보랏빛의 시선으로 천천히 옷가지와 책상 위, 액자들을 쓸어내다 이윽고 사진들에 시선을 멈췄다. 온통 자신과의 추억으로 가득한 흔적들. 발키리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함께 해온 모든 활동들의 사진과 생소하게는 그들의 팬들이 찍어 건네왔던, 보기 드문 무대 아래의 모습이 담긴 사진. 그 사진은 마치, 동료가 아닌 것만 같았다. 행복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그 사진은 연인에게서나 볼 수 있을 그런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욱 그 사진을 남몰래 애지중지하고 있었다. 내가 스승님과 정말로 연인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중히 간직했다.
지금 그 사진에 시선을 고정하곤 한참 동안 바라보는 스승님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보고 있는 것일까. 카게히라 미카는 도무지 그 생각을 읽어낼 수 없었다. 저 무덤덤한 표정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일까. 역겨움, 더러움, 불쾌, 당황, 께름칙함, 오묘함 또는 무관심. 온통 부정적인 감정만이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잔뜩 어지럽혀진 머리는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이내 생각을 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렸다. 카게히라 미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침대 위에서 몸에 힘을 빼고 누워 스승님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숨을 죽이며 그를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심장은 서서히 차가워지고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긴장을 하면서도, 신경은 온통 그를 향해있었다. 그의 불쾌하다는 시선이 제게 닿는 것이 무서워서, 지금 당장 그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렇게도 좋다는 감정을 실컷 표현하던 과거와는 달랐다. 스스로 자신의 감정을 깨닫고 인정하고 나서는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이런 행동을 한다면 당신이 싫어할까, 당신은 이런 것을 좋아했었나, 어떻게 해야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까. 나의 감정을 알아채지 못하는 채로. 그런 생각을 하며 매일매일을 보내왔다. 그렇게도 조심스러웠던 나날들을 고작 오늘 하루, 이 시간, 이 순간에 전부 없던 것처럼 잃을 수는 없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지금껏 나 자신을 속이며 아무렇지도 않게 당신의 곁에 서있었던가, 나는 당신이 없다면 세상을 살아갈 가치가 없어, 당신에게서 마저 버려진다면 모든 것은 끝이 나고 말 거야 그러니까.
평생 당신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렇게 예술을 창조하는 신이 되어 세상을 나아가면 돼.
한없이 낮아진 자존감은 사람을 갉아먹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자신이 점점 위축되어 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두러움은 모든 것을 감추어 알아채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두려움으로 인해 미카는 그만 손가락을 까딱하고 움직이고 말았다. 미카는 스승님이 자신이 깼다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남은 것은 스승님의 입에서 나올, 자신이 읽지 못한 생각들일 것이었다. 미카는 슈의 시선이 두려워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도 슈의 손을 꽉 쥐어 놓지 않았다. 자신을 버리지 말아 달라는 일종의 신호이자 간청이었다.
"...카게히라."
위에서 자신을 부르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화가 났거나 불쾌함을 느낄 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이 대답을 회피하고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이미 눈치챘다는 듯, 안심하라는 듯한 목소리였다. 애써 감고 있던 눈을 그제서야 힘겹게 뜨면, 자신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짓고 애써 눈꼬리를 내린 상대의 표정이 시야에 담겼다. 나의 확신 없이 불안했던 심장은 차근차근 가라앉았다. 불안함에 힘을 꽉 주었던 손에 힘을 풀었다. 긴장으로 온몸을 감쌌던 차가운 기운들은 흩어졌다. 나를 계속해서 편안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 얼굴을 보고는, 그만 충동을 이겨낼 수 없었다.
비쩍 말라 건조해진 입술과 보드라운 감촉이 맞닿는다. 입술을 떼어 다시 그 얼굴을 바라보면 잠시 놀라 눈이 커진 표정을 마주한다. 상대방이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입술을 천천히 쓸어내면, 그 손을 제 손으로 붙잡고는 다시 다가간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상대의 입술을 집어삼켜냈다. 움찔거리는 손을 꾹 잡아 깍지를 끼고 상대를 안심시켰다. 이내 진득해진 입술을 떼어내면, 건조했던 공기를 가득 채우는 뜨거운 숨. 그 숨들을 고르는 상대의 모습은 그 어떤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그것이 처음 보는 얼굴이기 때문이었는지, 비로소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확신 때문이었는지는. 아직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날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고, 더 이상 두려워할 것은 없다는 것. 품에 끌어안은 따스한 존재가 제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 단순히 그것들 뿐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날은 무척이나 행복으로 가득했던 날이었다. 침대 속에서 한 이불을 덮고는 조곤조곤 사랑을 속삭이던, 추억 속에 깊게 남은 날이었다.
∙ ∙ ∙
행복한 나날들은 이어져갔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더이상 서로를 피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츠키 슈가 지금껏 카게히라 미카를 피해왔던것은 미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자신의 마음을 인정하고, 그것을 받아들이고 난 뒤부터 미카를 대하는것이 어려웠고. 자신의 마음이 언제 들킬지 모른다는 생각에 피하기가 급급했던 것이었다. 온갖 박람회와 전시회를 돌아다니고, 직접 개최를 하고, 여러가지 작업을 동시에 맡아 어지러운 생각들을 방치했다고. 그리고 그러는 순간에도 계속해서 미카가 떠올라서 괴로웠다고.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상대를 피할 필요도 없고, 모든것을 함께할 수 있는것이었다.
그렇게 모든것을 함께 했다. 작업도, 아이디어 구상도, 무대의 연출과 의상제작도. 박물관이나 미술관, 드물게는 놀이공원과 워터파크도. 사람이 많은 장소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이츠키 슈임에도 제 연인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양보정도는 가능하다며 제가 나서서 갈 정도였다. 미카가 좋아하는 장소, 슈가 좋아하는 장소. 미카가 좋아하는 음식, 슈가 좋아하는 음식. 미카가 사랑하는 것, 슈가 사랑하는 것. 그런것들이 하나하나 모여 차곡차곡 쌓이면, 이내 하나의 글자를 형성했다.
「영원」
이 하나의 글자는 단순한듯, 무거운것들이 응축되어 만들어졌다. 진심으로 뭉쳐진 단어는 무엇보다도 단단하게 굳어졌다. 결코 쉽게 부서지지도, 무너지지도 않을 정도로.
그러나 그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략..결혼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자취로 인해 한동안 들어가지 않았던 본가에 들어서자마자 들은 이야기는 이츠키슈에게 있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였다. 기껏 제 연이 이어진 지 1년이 된 다음날이었다. 지난날, 미카와 제대로 된 기념일을 처음 가졌고, 1년을 기념하는 반지를 나누었다. 그 반지는 지금도 제 약지 손가락에 버젓이 끼워져있었다. 멋진 모습으로 주고 싶었다고 말하면서도 애써 눈물을 참으며, 울먹거리며 제 손가락에 그 얇디얇은 고리를 끼우는 미카의 모습이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눈앞에 그려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게 들려오는 말이라고는 얼토당토않는 통보뿐이었다.
"너는 차기 가문을 이어야 한다. 아이돌인지 뭔지는 이제 그쯤하고 가문의 뒤를 이을 준비를 해."
"저는 단 한 번도 가문을 잇겠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가문을 잇는다면 형님이나 누님도...!"
"내 말대로 해. 번복은 없어."
"...아버지!!!"
"약혼 대상은 이미 골라놨다. 너는 그냥 가문을 이을 준비랑 결혼 준비만 하면 돼! 그렇게 알고 있어라."
이츠키 슈는 통보식으로 전해오는 제 아버지에 반발하려 했으나 굳건한 아버지의 태도는 그대로 꺾일 줄을 몰랐다. 아무리 입을 열어 거절하고 제 뜻을 전해도 그것은 단 한마디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이츠키 슈가 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가서, 새하앟고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잘 다듬어진 손톱이 그의 손바닥을 뚫을 듯이 파고들 뿐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이츠키 슈는 제 자취방에 들어서자마자 애꿎은 코트를 옷걸이에 던지듯이 걸어놓았다. 그러고는 잘 빠진 버건디 색의 매끄럽고 폭신한 소파에 거칠게 앉아 양손으로 깍지를 끼고, 제 턱을 받치며 수만 가지의 방법을 궁구했다. 어떻게 해야 이 결혼을, 상속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예술적이고 자유로운 길을 걸어나갈 수 있을까. 깍지를 낀 손에 정갈하게 끼어있는 반지가 반짝였다. 이츠키 슈는 이내 손을 내려 무릎 위에 팔을 걸치고 그 반짝이는 반지를 어루만진다. 여기에는 아직도 네 온기가 남아있는데, 내가 그 결혼을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그렇게 생각하면 진갈색 원목 테이블에 올려둔 휴대폰에서 작게 진동이 울린다. 휴대폰을 집으려는 순간 테이블 위 유리에 살짝 닿은 손끝에는 냉기가 서렸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휴대폰의 홈버튼을 눌러 알림 내역에 시선을 고정했다. 끄는 법을 몰라 내버려 둔 온갖 어플들의 지저분한 알림들, 손가락을 움직여 그 알람들을 치우면 두 개의 메시지가 도착해있다. 그리고 발신인의 이름을 보는 순간, 진보라색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카게히라, 그리고 아버지. 미카의 메시지는 단순한 일과의 이야기일 것이다. 급하게 본가로 간 것에 대한 안부라던가, 그런 시답잖은 일상의 이야기. 중요한 것은 바로 아버지의 메시지였다. 방금까지 굳건한 태도를 보였던 아버지가 이제 와서야 갑작스레 입장을 바꾸고 저의 의견을 존중해 주겠다며 연락을 하실 리가 없었다. 필시 이 메시지는 본가를 뛰쳐나온 제게 아직 하지 못한, 추가적으로 해야 할 남은 이야기일 것이 분명했다.
아직 어두워지지 않은 화면의 알림 내역에 천천히 손가락을 갖다 댔다. 떨려오는 손가락을 막을 힘은 없었다. 도대체 무엇이 더 남았다는 말인가. 결혼에 대한 이야기, 그 상대에 관한 이야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식으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말은 수도 없이 질릴 정도로 귀에 박혀있다. 남은 이야기가 무엇일지를 이츠키 슈는 도무지 예측할 수 없었다. 떨리는 손가락이 차가운 화면에 온전히 닿았다. 손가락을 떼내는 순간, 그리도 궁금했던 내용의 메시지가 눈동자에 담겨온다.
이츠키 슈는 그 메시지를 보고 나서, 계속해서 휴대폰을 울려오는 카게히라 미카의 메시지에 곧장 답신을 보낼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 이츠키 슈는 무거운 눈을 겨우 뜨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그날 새벽,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음을 뜻하고 있었다.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던 슈는 시간이 지나고 그제서야 자신의 손위로 무언가 무겁고 따스한 것이 올라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손으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맞추면, 그 자리에는 검은빛의 머리칼이 찰랑이는, 깊게 감긴 눈의 속눈썹이 선명한, 제 연인이 곤히 잠들어있었다.
잠시 몸이 굳고 딱딱한 표정으로 미카를 내려보던 슈는 반대편의 손을 들어 미카의 머리를 조심히 정리해 주고, 천천히 쓰다듬었다. 미카는 제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길에 잠시 잠꼬대를 하다가도, 서서히 눈을 떠 상황을 파악했다. 몇 초간의 정적이 공기를 감싸면, 미카는 깜짝 놀라서는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부끄러운 듯 얼굴이 새빨개진 상태로 슈에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스, 스승님! 인자 인났나!!!"
"...오늘은 나답지 않게 늦잠을 잤군. 언제 온 것이냐."
"온 지 얼마 안 됐다. 스승님, 연락도 안 보고 전화도 안 받으니까는 걱정이 돼서...내 멋대로 와버렸데이."
카게히라 미카는 방금 일어난 이츠키 슈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던 탓인지, 제멋대로 말도 없이 찾아온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 슈와 제대로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입술을 옴짝달싹하며 제 손만을 꾸물거리고 있었다. 이츠키 슈는 그런 미카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도, 자신이 새벽 내내 한 고민들은 전부 헛된 것이라 여기고는 이내 굳은 표정을 풀어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미카가 내내 조심히 깔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얼굴 앞에 들고나서 입을 열었다.
"뭐, 별로 신경 쓰지는 않지만 말이다. 이 손에 남은 자국을 빼면."
"응아...? 자국......?"
"그래, 이 손 위에 남은 자국."
"이, 이게 뭐꼬!!! 우...우짜노 내가 고마 깔고 자다가 만든갑다..."
"흥. 자, 늦은 아침식사나 하러 가자는 거다."
"아...응! 내 열심히 만들었데이."
호오, 그럼 내가 기대해도 되는 것이겠지. 이츠키 슈는 능청스레 대화를 넘기면서 미카와 나란히 발걸음을 하며 아래층을 향했다. 제 왼손에 아직까지 선명하게 남아있는 미카의 손자국을 문지르며. 지난 새벽의 모든 걱정과 고민들이 말끔히 해결됐다는 듯, 큰 결심을 마음에 다지면서. 그날은 어쩐지 아무 일정도 잡히지 않았던 탓에 꽤나 여유롭고 한가한 시간을 함께 보냈다. 만들고 싶었던 것들을 만들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고, 미뤄두었던 영화들을 시청하면서, 그렇게 평화롭게.
슈를 위해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와 슈의 상태를 확인하고, 함께 먹을 아침을 차리고, 정돈되지 않은 자잘한 물건들을 치운 다음 침대에 몸을 걸쳐 엎드려 한잠을 잤던 미카는 잔잔한 영화를 보다가 결국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슈는 곤히 자는 미카를 깨지 않을 정도로 살살 들어 제 침대에 살포시 눕힌 다음. 머리칼을 살살 쓰다듬고, 자는 미카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하며 속삭였다.
"잘 자, 미카."
"――――“
∙ ∙ ∙
다음날 아침, 새의 지저귀는 소리에 그만 잠에서 깬 카게히라 미카는 제 바로 옆이 어쩐지 허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떠지지 않은 눈에 손으로 먼저 더듬어본 옆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슈 자신도, 그의 흔적도, 미세하게 남았을 온기도. 그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새벽 내내 비어있었다는 듯, 차가운 기운만이 제 손끝을 맴돌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면 모든 기대를 비웃는 듯이 텅 빈 베개만이 저를 반기고 있었다. 서둘러 시야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면 어딘가 빈 곳들이 하나하나 보이기 시작했다. 슈가 늘 들고 다니는 지갑과 휴대폰, 자주 입는 버건디 색의 재킷과 그 재킷에 달고 다니는 번뜩이는 브로치까지. 하나하나 빠짐없이 방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슈는 그것들을 외출하는 것이 아닌 이상 항상 같은 자리에 두어야만 성미가 풀리곤 했다. 그 말인즉슨, 이츠키 슈는 제 집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냥 외출이 아니었다. 그 사람은 늘 반드시 말없이 어딘가를 갔다 올 때 메모를 두고 외출했으며 아무리 바쁘더라도 메시지를 남기고 가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집을 떠났다는 것이 불안했다. 그저께만 해도 슈는 물건들을 본래 자리에 딱딱 두고선 집에만 있었다. 최근 발키리의 활동 스케줄은 전혀 없는 데다가 급한 약속 역시 없을 것이 분명했다. 미카는 어쩐지 불안함이 점점 커져만 갔다. 그렇기에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집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스승님의 공간은 이곳 뿐이래이. 언제까지나 밖에 있을 수는 없지 않나. 여기로 반드시 돌아올끼다. 그렇게 생각하고 기다리면 수없는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잠에서 깬 미카의 앞에 남은 것은, 정갈하게 놓인 청첩장이었다.
미카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계속해서 그 청첩장을 바라보았다. 이건 도대체 뭐지. 왜, 나와 스승님만의 공간에, 이런 것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게 꿈인가 싶어 볼을 세게 꼬집어 보기도 하고, 눈을 수도 없이 깜빡이며 현실을 부정했다. 차마 청첩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열어볼 수 없었다. 꽤나 반듯하고 깨끗한, 두께 있는 그 청첩장은 마치 제게로 날아온 사형 신고서 같은 존재였다. 어째서, 어째서 이게 나에게? 이 방에, 이 집에 들어올 수 있는 존재는 자신을 제외하면 딱 한 사람뿐이었다. 그 사람이 며칠, 몇 주 동안 행적을 감춰놓고는 마지막에 제게 남기고 간 것이 청첩장인 것이었다. 청첩장의 오른쪽 아래 예술적으로 쓰여진 필기체가 거슬린다. 그것은 당신의 필기체임이 틀림없었기에, 이것이 당신과 관련이 있다는 증거이기에.
심하게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미카는 오랜 부정 끝에 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끈끈하게 붙어있는 스티커를 떼고, 천천히 봉투를 열어 종이를 끄집어냈다. 어쩐지 청첩장의 두께에 비해 얇고 빳빳한 종이가 낯설었다. 맨들 거리는 질감이 소름이 돋았다. 접혀진 종이를 펼치면, 그 자리에 있는 당신의 필기체로 쓰인 '웨딩'이라는 글씨가 나의 머릿속을 헤집어놓았다. 그 아래 쓰여진 당신의 이름과 바로 옆의 모르는 이름이 원망스럽다. 도대체, 왜, 어째서. 우리는 평생 함께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함께한 그 모든 것들이 전부 우리의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당신이 내게 준, 나의 손에 들려진 이것이 나를 몹시도 괴롭게 만드는 것일까. 미카는 현실을 계속해서 부정했다. 이것은 환상에 불과할 거라고 생각하며 다시 들지 않는 잠에 들려고 했다.
겨우 잠든 짧은 잠에서 깨어나면 베개가 축축했다. 코 끝에 맴도는 짠냄새가 아려왔다. 심장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이고, 그 상황은 끝없이 이어져갔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미카의 눈은 텅 비어있다. 아무것도 채워져있지 않았다. 힘없이 무겁기만 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주섬주섬 어색한 옷을 몸에 끼워 맞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새까만, 어두운색의 차림새가 마치 까마귀 같다. 불길함을 상징하는, 누구도 환영하지 않을 불운의 까마귀. 그럼에도 미카는 발걸음을 오직 한곳으로 향했다. 초대받은 장소를.
미카가 떠난 집 안에는 덩그러니 놓인 청첩장이 바람에 의해 휘날렸다. 편지를 꺼내두어 텅 비었어야 할 봉투 안에는, 하나의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얇디얇은 종이에 희미하게 비치는 빼곡하고 정갈한 글씨가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 쪽지는 그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았다. 집 안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식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주변에서 한 번쯤은 봤을법한 유명 인사부터, 고위직의 명문가 자제들까지. 안다면 알만한 사람들이 드글거리는 공간이었다. 빛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까마귀는 애써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고 했다. 제 눈을 누군가 보지 않을까 싶어 정갈한 머리카락을 헝클어서라도 얼굴을 가렸다. 두꺼운 안경테로 눈을 가리려고 했다. 그렇게 어수선하게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리고 있어도 식장의 가장 구석에 서있는, 새까맣고 혼잡한 까마귀를 모두가 신경 쓰지 않았다.
카게히라 미카는 얼른 식이 시작되길 바라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만 더 이 시간이 계속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미카의 시야에 담기는 그 사람의 차림새는, 그야말로 완벽에 가까웠다. 반듯하고 각져있는 새까만 수트, 번뜩이는 정장구두와 가슴 쪽 주머니에 꽂혀있는 새하얀 제라늄, 잔뜩 쓸어올린 머리카락이 어쩐지 낯설기만 하다. 저런 완벽한 모습을, 이런 초라한 모습의 자신이 멀리 구석에서 겨우 본다는 현실이 씁쓸했다. 카게히라 미카는 결국 눈을 돌려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자리에 앉아 고개를 푹 숙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진행을 맡은 사회자가 화려하게 식을 시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가장 앞을 바라보면 모든 것이 눈부시다. 번뜩이는 보석들이 눈동자를 찌를 기세로 빛을 반사시켰고 색색깔의 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오히려 마음을 더 불편하게만 만들었다. 이런 곳에 나를 불러놓고, 왜 그런 차림새에 이런 장식들인 것인지. 이게 정말로 보여주고 싶은 광경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는 불편함이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
카게히라 미카의 그런 생각은 실제로도 틀리지 않았다. 이 결혼식의 모든 구성은 이츠키 슈의 예술도, 가치관도, 그 어느 하나 무엇도 들어가지 않았다. 버건디 색이 잘 어울리고 드레스 같은 화려한 의상을 좋아하는 그라면 분명히 레이스와 프릴을 곳곳에 박아 넣었을 터인데도, 이 장소에는 그것들의 티끌 하나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식장은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상대를 배려한 그의 선택이었을까, 평생을 함께하기로 다짐한 상대를 위한 결정이었을까. 미카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더욱 우울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신랑, 입장!
크게 울리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리면 덤덤하게 걸어들어오는 당신이 보인다. 쭉쭉 길게 뻗은 다리가 거침없이 앞을 향한다. 새까만 옷을 입고 걷는 모양새가 낯설다. 모든 것이 낯설어서 두려웠다. 나의 눈에 담기는 당신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뒤이어 신부가 입장하고, 사회자의 앞에 서서 언약을 맺을 때까지 당신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또 나만 설레발을 치고 진심이었던 것인가. 밉다. 말도 없이 떠나놓고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당신이. 그런 와중에도 여전히 당신의 그 모습을 보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내가.
언약식이 끝나고 나면 결혼식의 메인을 장식하는 꽃. 사랑의 입맞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반드시 할 것이라는 확신도 그 무엇도 없지만 카게히라 미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언약식이 끝나는 순간, 미카는 식장을 아주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빠져나갔다. 모든 것을 지켜보았어도 차마 그것만큼은 볼 자신이 없었다. 스승님이, 애인이었던 사람이 다른 여인과 입맞춤을 하는 것,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그것을. 카게히라 미카는 초라해진 어깨를 축 내린 채 그대로 건물에서 나와 힘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익숙하게 8자리의 버튼을 누르면 청량한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오늘따라 무겁게만 느껴지는 현관문의 손잡이를 느리게 내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면 쾌쾌한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다. 먼지가 가득한 자취방. 언제 마지막으로 치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멍하니 거실을 바라보면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게히라! 내가 집은 늘 청결함을 유지하라고 누누이 말했을 텐데! 정말이지 말을 듣지를 않는구나!"
황급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면 그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텅 빈 집 안에 그 사람이 있을 리가 없을 터인데도. 도대체 무엇을 기대한 것인지. 들려온 환청은 심장을 찌르듯 조여왔다. 답답한 마음에 대충 입고 있던 옷을 가볍게 갈아입고 나서 다시 문밖으로 나섰다. 계단 하나하나가 오르기 버거웠다. 한층 한층 오를 때마다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답답함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굳게 닫혀있는 옥상 문을 힘을 주어 열어냈다. 불어오는 바람이 머리를 잔뜩 헝클었다.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오는데, 심장은 아직도 바짝 쪼여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코로 들어오는 공기는 가시가 돋듯 머릿속을 아프게 찔러왔다. 고개를 올려 하늘을 바라보면, 쨍한 푸른색과 솜사탕 같은 구름이 천천히 떠다니고 있다. 동그란 구름모양이 마치 그 사람 같다. 다시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에 고개를 푹 숙였다.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옥상의 난간 위로 왼발, 오른발을 올려 바로 섰다. 온몸을 타고 흐르는 바람이 간지러웠다. 멀리 보이는 건물들이 작아서 마치 모형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참 동안 건물들을 바라보다가, 주머니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던 브로치를 꺼내들었다.
빛바랜 버건디 색의 레이스 위 닳아버린 감색의 프릴, 정갈하게 만들어진 리본 위에 깊고 진한 루비가 구멍구멍 까져버린 금테를 두른 채 박혀있다. 브로치를 손에 쥐고 있으면 그 당시의 기억이 다시금 상기된다. 당신은 모르는, 나만이 알고 있는 그때의 추억. 우리가 가장 처음 만나 내가 이것을 받아들고 헤어질 때까지의 모든 장면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홍안의 미소년이었던 스승님이 내게 손을 내밀어 주고, 얼굴에 묻은 먼지를 털어준 다음 가방에서 꺼냈던 브로치. 처음 봤던 보석과 하늘하늘한 레이스는 정말 반짝였다.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브로치를 바라보니 크기는 작고 꽤나 낡아져있다.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브로치를 손에 쥐고 다시 하늘을 바라보는데, 너무 오래 멍하니 있었던 탓인지 손에는 점점 힘이 빠졌고 실크천의 레이스가 손에 스치는 느낌과 함께 꽉 차있던 손이 비는 느낌이 들었다. 급히 아래를 내려다보니 브로치가 저 밑으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브로치는 한참이 지나 바닥에 떨궈졌다. 깊고 진했던 루비가 깨진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신발을 하나하나 벗어 정갈하게 정리해두었다. 여전히 하늘을 파란색이었지만 좀 전보다는 흐려진듯한 느낌이었다.
"안녕, 나의 ――.“
∙ ∙ ∙
텅 빈 집의 현관에서 급하게 8자리의 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경쾌한 소리가 들리고 난 후 거칠게 열린 문에서는 머리가 죄다 흐트러진, 검은 예복이 아니라 평소 같은 벨벳 색의 와이셔츠에 잿빛의 코트를 팔에 들고 숨을 헉헉대는 이츠키 슈가 있었다. 카게히라! 이츠키 슈는 들어서면서 그 집주인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하지만 아무도 없는 그 집에서 대답 따위가 들릴 리 없었다. 슈는 평소와 달리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넘기며 거추장스러운 구두를 벗은 후 신발도 정리하지 않고 미카의 집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방, 화장실, 베란다, 그 좁은 집에서 미카가 있을 법한 모든 곳을 둘러보아도 그는 인기척 하나 없이 그 집에 존재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손가락 사이사이에 낀 채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은 이츠키 슈는 갑자기 불현듯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안된다는 말을 연신 중얼거리며 코트도 바닥에 떨군 채 신발을 구겨 신고서 계단을 빠르게 올라갔다. 체력도 없으면서 한 칸, 두 칸, 점점 한 번에 오르는 계단 수를 늘려가며 옥상을 향했다. 바람에 의해 조금씩 흔들리고 있는 열린 옥상 문이 슈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문을 손으로 밀쳐 거칠게 열면 저 멀리 옥상의 난간 위로 익숙한 것이 보였다.
슈는 몸을 잠시 멈칫하더니 다시 발걸음을 옮겨 자신이 무언가 잘못 보았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천천히 휘저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난간의 바로 앞에 멈춰 섰다. 그의 앞에 정갈하게 놓여있는 신발은 이미 그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신발이었다. 제가 미카의 생일이 되었을 때, 운동화가 심하게 닳아있는데도 꾸준히 그것을 신고 다니는 것이 신경 쓰여 그의 눈 색과 머리색에 맞춰 직접 디자인하고 만들었던 수제 컨버스 신발. 단 한 번도 접근해 본 적 없는 영역이었던 탓에 몇 주를 들여서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던, 세상에 단 하나뿐인 신발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에 곱게 묶인 리본 끈이 휘날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인지, 손에 닿은 컨버스는 차게 식어있었다. 이츠키 슈는 한 발짝 더 앞으로 다가가 아래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제가 사랑했던 사람의 끝이 잔인하게 박혀버린 바닥을 눈에 담을 자신이 없었다. 주춤하며 뒷걸음질을 치다 그만 발이 걸려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를 조여오는 괴로움보다 고통스러울 수는 없었다. 이츠키 슈는 그 자리에서 한참토록 고개를 푹 숙인 채 허무하게 현실을 부정했다.
"...기다려달라고, 했을 텐데..."
그렇게 한참 동안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을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지, 어느덧 날이 지고 있는 것이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츠키 슈는 입을 꾹 닫은 채 그 자리에서 부들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용히 지고 있는 해를 바라보았다.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다. 앞으로 걸어가 차디찬 컨버스를 품에 안았다. 시린 품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멍하니 컨버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 다시 옥상의 문으로 향했다. 계단을 하나하나 내려갔다. 바닥으로 발을 디딜 때마다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끝에 다다른 곳은 그가 사랑했던, 사랑하는 사람의 집이었다.
이츠키 슈는 하나하나 천천히 모든 구석들을 전부 눈에 담고, 손으로 쓸어냈다. 네가 살았던 흔적, 네가 남겼던 온기, 네가 가득 찬 이 공간. 어느 하나 빠짐없이 전부 카게히라 미카라는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천천히 돌아다니다 마지막으로 도달한 공간은 미카의 방이었다. 인형들로 가득 찬 침대와 사진들이 잔뜩 걸려있는 벽, 재봉 도구와 디자인용 도구들이 늘어진 책상. 이츠키 슈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한참이나 허공을 주시하던 슈는 몸을 움직여 침대의 가장 구석으로 구겨들어갔다. 미카가 가장 사랑하던 인형을 들어 컨버스와 함께 품에 안고는 꽉 쥐어보았다. 그의 향기가 나는듯하더니 그 향기는 공중으로 흩뿌려지며 사라지고 있었다.
"괜찮다. 난 늘 네 곁에 있을 테니."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평생토록 나를 바라봐 주었던 네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 말하기가 낯부끄럽다는 이유로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한마디. 그때는 뭐가 그렇게 어려웠던 건지, 이제와서 조금은 후회도 돼. 말하지 못했던것이 허무하기도 하고. 네가 늘 바라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말하지 못했던 나 자신이 혐오스럽고 가증스러워. 왜 말하지 못한 것인지. 그깟 자존심 하나가 너보다 더 중요했을까.
사랑해, 그 누구보다, 그 어떤 것보다 더. 네가 소중하고 중요해.
그리고
미안해.
눈송이를 손에 가득 담았다. 오래도록 그 눈송이를 바라보다 망설임 없이 입에 담고는 이내 목구멍을 넘겨 삼켜냈다. 한 알 한 알 삼키는 것이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그 고통은 얼마 가지 않아 사라졌다. 이츠키 슈는 다시 품에 있는 것들을 꽉 안고서 텅 빈 눈으로 그가 자리한 공간을 쳐다보았다. 허공에 손을 뻗어 만져지지 않는 것을 만지려고 했다. 점점 시야가 흐려지고 눈이 감기려고 할수록 이곳에 존재하지 않을 사람이 제 앞에 서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볼에 손이 닿는 순간, 세상은 컴컴해졌다.
터벅, 터벅, 고요한 어둠이 가득 찬 자리에 하나 둘 빛이 드러났다. 계단을 오르는 소리는 평범했다. 발걸음 소리가 멈추면 차례대로 8개의 버튼이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열리지 말아야 할, 열 수 있는 사람이 없을 집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 사람이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제 집의 문을 열고 아무렇지도 않게 집안으로 들어갔다.
*
신발을 벗고 그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작은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찬 볼의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래로 떨궈지는 눈물은 공중에서 사라졌다. 손에 힘이 풀려 꽉 쥐고 있던 브로치를 그만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리고 브로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바닥으로 낙하하고 있었다. 끝내 바닥에 박히는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미카의 심정은 혼란스러워졌다. 손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려왔다. 쉽게 보던 죽음이라는 것이 이리도 무서운 존재였던 것인가.
미카는 결국 뒷걸음질을 치다 난간 위에서 떨어져 넘어지고 말았다. 제 자리에서 고통을 감수하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머리를 부여잡고 한참이나 고민을 했다. 스승님은 이미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한 사람이니 더 이상 스승님의 전 연인이었던 자신은 그의 곁에 머물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머문다고 하더라도 나의 심장만이 찢어지도록 아프겠지. 스승님 역시 자신이 결혼을 하니 전 연인에 대한 예의로써 마지막으로 청첩장을 건넨 것 일 것이다. 나는 이제 그 사람의 곁에 나란히 설 수 없어. 하지만 지금 당장 혼자 있는 것은 너무도 벅차다. 나는 어디로 가야만 하는 것일까. 스승님의 곁에 있을 수 없는, 혼자 남은 나는.
그렇게 오래도록 고민을 하면 끝으로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억을 바탕으로 그때 자신이 썼던 방법이 생각나자 그제서야 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옷을 털고 다시 신발이 있는 자리로 다가가 그 위로 손을 얹어 자신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들을 그 자리에 두었다.
"안녕, 나의."
"미련."
*
미카는 그 자리에 미련을 두고 갔다. 목숨이 아닌 미련을. 그리고 급히 몸을 돌려 자신의 고향을 향했다. 답례제, 그때처럼 고향으로 가면 무언가 해소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곳에 가서 미카는 아직 자라나고 있는 동생들을 만나고 그들의 꿈을 듣고 나서야 살아야 할 기력을 얻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불과 몇 시간도 걸리지 않은 일이었다.
카게히라 미카는 현관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신발이 낯설면서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익숙한 신발이었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집안에 발을 디디면 뭔가 평소보다 쎄한 듯한 기분이 들며 위화감이 온몸을 감쌌다. 그는 이상한 집안의 분위기에 선뜻 발을 옮기지 못했다. 늘 집안을 나갈 때면 활짝 열어두고 나가는 제 방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발을 움직였다. 문고리에 손을 내려두면 철로 된 문고리가 몹시도 차가웠다. 집안 전체가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긴장으로 입에 고인 침을 살짝 삼키고 손잡이를 꽉 잡아 밑으로 내리자 서서히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오래된 목재의 문이 비명을 질러댔다. 소름 돋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인상을 찡그리며 실눈을 뜬 채 방 안을 살펴보면, 가장 먼저 보이는 그 자리에, 새하얗게 잠들어있는 제 연인이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었다. 방은 사람이 안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할 정도로 서늘했다. 너무나도 고요했다. 그런 방 안에서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정말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조그마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고 작게라도 어깨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마치......
-네가 아주 좋아하는 「스승님」도 꽤 좋은 집안의 사람이었지?
-약혼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고, 지금은 아이돌의 '그런 이야기'도 전혀 금기로 여겨지지 않는 분위기니까―――
-어느 날 갑자기 결혼 얘기가 튀어나와도 이상하진 않겠네?
-스승님이, 결혼......?
-.........
-......그럼 죽어버릴지도 모른데이.
-뭐? 그건 외로워서 죽는다는 거야? 아니면 스승님이나 결혼상대를 죽게 한다는 거야!?
죽어버릴지도 모르는 것은 카게히라 미카도, 이츠키 슈의 약혼자도 아니었다.
자신의 예술을 잃고, 파트너이자 연인을 잃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 이츠키 슈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섞여 코 끝을 맴돌았다. 이상한 향기가 풍겨오는 것 같았다. 제 앞에 있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도 무덤덤하고 당당하게 웨딩홀을 걸어 나아갔던 그 사람이 지금은 너무도 작아 보였다. 안 그래도 마르고 얇은 손목이 뼈만 남은 것처럼 가늘었다. 늘 힘주어 인상을 쓰고 다니던 얼굴이 메말라 창백해 보였다. 당신이 이리도 연약해 보이는 사람이던가. 불안이 급습해왔다. 그 사람의 품에는 익숙한 인형과 신발이 보였다. 내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인형, 몸에서 떼어놓으려 하지 않았던, 나와 닮은 고양이 인형. 그 인형 옆에 소중히 안겨있는 것은, 내가 버렸던, 나의 미련. 왜 그것을 그렇게 조심스럽게 안고 있는 거야, 어째서, 그런 모습으로. 움직이지 않는 손을 억지로 움직여 침대 위로 힘없이 놓여있는 당신의 손을 맞잡으면 딱딱하고 차가운, 핏기 없는 손의 감촉.
지옥까지 함께 하겠다고 했지만,
나를 따라 지옥까지 와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나보다도 먼저 지옥으로 가도 좋다는 말이 아니었어.
참을 수 없는 감정이 덩어리를 토해내듯, 울컥 튀어나온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당신의 손을 아무리 두 손으로 꽉 붙잡아 보아도 희미한 온기조차 전해지지 않았다. 흐릿한 시야의 너머로 당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뜨면 변함없이 창백한 얼굴이 짙게 번져있어 나의 바로 앞에 당신이 있는지, 보이지 않는 벽이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손을 뻗어 건드린 차가운 뺨이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었다. 스승님은 완전히 의지 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있는, 아름다운 앤티크 인형 같았다.
인형사는, 인형을 너무도 사랑한 탓에 그만, 인형이 되어버린 것처럼.
시야가 다시 흐릿해지면서 끝내 새까맣게 물들어졌다. 앞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공간을 하염없이 걷다 보면 점점 활자들이 공중에 떠다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아닌 무작위적인 활자들이었다. 그러나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수록 그것은 글자가 되고, 문장이 되었다. 그것들이 별 의미가 없는 대수롭지 않은 문장들이라고 생각했다. 문장을 읽어내리는 순간, 심장이 먹먹해졌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 그것들을 헤치고 문장에서 단어로, 단어에서 활자로 부숴버렸다.
카게히라! 사탕은 적당히 먹도록 해라!
카게히라, 조금은 성장했구나.
정말이지 조금이라도 눈을 떼면 금세 사고를 쳐서는.
무슨마ㄹ을 하는거ㄴ지 전혀 모르겠군.
우리는 세계에서 단 둘뿌ㄴ인 동지이자 도ㅇ포, Val kyri e니까.
지금 당자ㅇ 나 를 주ㄱ ㅇㅕ ㄹ ㅏ.
나ㅁ의 일ㅂ ㅗ다ㄴ 너 ㅅㅡ스로 ㄹㅡㄹ 걱저ㅇ――
인가ㄴ 으 로 ㅅㅏㄹ자 카게ㅎㅣ라, 우 ㄹㅣ는 인 가ㄴ으로 ㅌㅐ어 나 ――
―러 ㄴㅣ까 스승니ㅁ이ㄹㅏ느ㄴ 소 중하ㄴ 톱 ――퀴 가 피ㄹ요하ㄴ――
―― 아ㄱㅏ ㅈ ㅏ 카게ㅎㅣ라, 우ㄹㅣ ――으ㅣ 지 ㅂㅇ ――
ㅇㅏ ―― ㅈㅣㄱㅡㅁ으 ㅣ 스스ㅇ니ㅁ 오ㅐㄴ ㅈㅣ ㄴㅓ무 예 ㅃㅡ――
지오ㄱ 끝ㄲㅏ지 함께ㄷㅏ
차마 마지막 문장만큼은, 부수지 못했다. 부술 수 없었다. 평생의 맹세를 부숴서는 안됐다. 새까만 시야의 끝에 도달한 곳은, 내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장소였다. 쾌쾌한 먼지 냄새가 가득 풍겨오던 잿빛의 우중충한 날. 유독 빛나던 한 존재. 찬 바닥에 앉아 시커먼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던, 홍안의 미소년이 바로 앞에 있었다. 너무도 작아져 버린 그 손으로 나의 손을 내밀면, 시야는 다시 새하얗게 변해갔다.
새하얀 빛이 사라지고 현실은 눈앞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추억을 전부 깨트리고 나니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인형 같은 당신은, 따스한 온기가 사라졌어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숨을 쉬지 않는 차가운 당신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이 추악했다. 차가운 손을, 팔을, 얼굴을 아무리 잡고 쓸어내도 여전히 손가락 끝은 딱딱하게 굳어갔다. 나는 더 이상 의미 없는 행동을 멈추고 그 사람의 얼굴을 마치 조각상을 어루만지듯, 앤티크 인형을 조심히 다루듯 그렇게 천천히 쓰다듬었다.
가엾은 나의 피그말리온,
당신과 나,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거야.
그곳이 설령 끝도 없이 고통과 악몽이 가득할 지옥일지라도.
뼛속까지 시린 바람이 거칠게 불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새까만 하늘에 이윽고 새하얀 눈이 내려올 때.
차갑게 얼어버린 장미를 잃은 나비는, 서리 낀 꽃잎의 위로 내려앉아 영원히 날갯짓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