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정의 조각
신탕
지금의 감정을 정의하자면 이정도가 되겠군.
스승은 진열장에서 자그마한 결정을 꺼냈다. 겉면은 투명한 수정에 가까웠지만, 심부에서부터 옅은 보랏빛이 비치고 있는 조각은 그의 손가락 안에서 작게 빛나고 있었다. 당신은 그것을 조금 들여다보다가, 사탕을 삼키는 것처럼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혓바닥 위에 결정 조각이 단정하게 올라갔다가 이내 혀 밑으로 감춰지는 걸 보면서, 나는 괜히 발등을 세워 신발코를 눌렀다.
외출 준비를 마친 스승은 오늘따라 기분이 좋아 보였다. 엉겨 붙듯 무게를 실어 팔짱을 껴와도 그는 제지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할 수 있던 시절에는 대신해서 그의 기분을 물었겠지만 ‘그녀’는 이제 말을 하지 않으므로, 나는 그의 손 대신 조금 더 위로 시야를 바꿔 스승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면, 색이 다른 눈동자가 모두 감추어질 듯 휘어 웃는다.
“스승님, 오늘따라 기분 좋아 보이네. ”
“카게히라. 너라면 방금 내가 어떤 조각을 물었는지 알아챘을 텐데.”
”응후후, 내는 바보니까 아무것도 모르는걸~… 다만 스승님이 꼭 사탕을 먹는 것 같아서, 내도 괜히 단 게 먹고 싶어졌을 뿐이다.“
그렇게 말하면 그는 코트 주머니 속의 파우치에서 자그마한 알사탕을 꺼내 내게 건네곤 했다. 역시나 오늘도 스승은 사탕을 내밀어와서, 나는 스승님 밖에 없데이~ 하곤 우는 시늉을 하며 얌전히 사탕을 받았다. 바스락거리는 껍질의 소음만큼 눈알을 반짝이면서, 그가 결정을 삼켰던 모양새를 따라 하듯 천천히 사탕을 입안에 밀어 넣었다. 혓바닥 위로 사탕을 굴리다 마찬가지로 혀 밑으로 밀어 넣으면 고급 디저트점 특유의 은은한 단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포도향이었다.
자신은 먹지도 않을 단 것을 구태여 지니고 다니는 건 그의 상냥함 탓이었다. 그건 이츠키 슈가 스스로의 감정을 어떻게 설정했든 변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나는 한쪽 볼로 사탕을 밀어 넣고 천천히 녹여 먹으면서, 현관문을 열었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나에게 처음 선보였던 건 자그마한 기계였다. 카세트 플레이어 정도나 될 법한 네모난 기계에는 얇은 선들이 가득 연결되어 있었다. 스승은 이것이 얼마 전 새로이 출시된 신형 감정 설정 기계라고 했다. 뇌파의 미세한 변화로 구분해낸 자신의 감정을 추출해 결정 조각으로 만들고, 상황에 따라 번갈아 사용하며 자신의 감정을 설정하고 통제할 수 있다고. 설명하는 그는 기계가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길에 오르며 성정이 유해졌다지만, 스승은 여전히 자신이 ‘소유’하거나 ‘제어’할 수 있다 여기는 건 모두 제 손안에서 완벽히 조율되어야만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에는 자신의 ‘감정’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나 또한 감정 설정 기계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일본에도 한차례 기계가 수입되어 홍보된 적이 있었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고 체면치레를 하는 사람들을 겨냥하여 셀링했지만, 오히려 이 점에서 일본의 정서와 맞지 않아 얼마 가지 않아 사업을 철수했었다. 고가의 인식 기술을 사용한 만큼 터무니없이 비싼 가격도 부진에 한몫하긴 했었다. 반대로 서양에서는 제법 잘 나간다고 들었는데, 스승은 프랑스에서 그것을 구매해온 모양이었다.
한때는 그가 차라리 아무 감정 없이 무(無)의 상태로 있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굴욕감, 모멸감, 분노와 같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응축된 무언가의 덩어리보다는 차라리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자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붉게 물들어 버린 청춘은 더이상 푸르지 못했고, 칩거하던 시절의 스승은 그를 경애하는 나의 시선에서 봐도 보기 힘들었으니까. 칩거를 반복하며 자신의 감정을 다 소모했을 때, 정말로 텅 비어버린 그를 보고나선 그 생각을 저버렸었다. 겨울이었고, 창밖에서는 눈이 내렸지만, 스승은 내다보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공백을 메우기라도 하는 듯 어린 시절부터 애지중지하던 금발의 인형을 소중히 품에 안았다. 인형에 이름을 붙였고, 인형에게 숨을 불어넣었으며, 목소리를 입혔다. 당신의 인형은 여기에 있었는데도,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의 그는 완벽해진 셈이다.
사람이 조금 붐비는 거리를 걸으면서도, 스승은 내내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녀와는 지난번에도 만남을 가졌는데 자신과 말이 제법 잘 통했다면서, 예술론이 비슷한 사람을 오랜만에 보아 고양된다고 했다. 스승님은 그 누야가 그래 좋나. 장난기를 섞어서, 씁쓸한 얼굴로 말을 걸면 그는 단호하게 그녀는 그저 사업 동료이자 집안에서 강제로 마련한 자리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적어도 예술의 부분을 제외하곤, 이츠키 슈는 강한 긍정에 강한 부정을 표하는 사람이었다. 정말로 노했을 때 한껏 치켜 올라가는 눈썹이 오늘은 평온해서, 나는 그 속에서 긍정을 읽어냈다.
유동인구가 가장 많은 상점가를 두고 스승과 나는 엇갈렸다. 스승은 이제부터 약속 장소로 갈 테고, 나는 근처의 극장으로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했다. 헤어지기 전 그는 나에게 무리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제는 저를 단순한 부품으로 생각하며 과로하지도 않고, 자신의 몸상태를 파악할 줄 아는 성인인데도. 이츠키 슈는 나를 여전히 마냥 관리가 필요한 대상으로 보았다. 나의 예술관이라던가, 인격을 존중하는 것과는 별개의 영역으로.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나를 위해 따로 메인테넌스 시간을 마련했고, 이제는 스스로 몸을 점검할 줄 알지만, 나는 혀 밑에 숨긴 사탕마냥 고스란히 자립을 숨겨두곤 했다. 스승님이야말로 즐겁다고 밤늦게 들어오지 말고. 재밌게 놀다 와라. 나는 손을 과하게 붕붕 저으며 인사했다. 스승은 놀이가 아니라며 코웃음을 짓다가도, 이내 몸을 돌려 인파 속으로 걸어가 사라졌다.
스승의 머리털이 미약하게나마 보일 때, 나는 이츠키 슈의 뒤를 따라갔다.
스승은 자신의 일정과 상황에 따라서, 미리 추출해둔 결정 조각을 골라 혀 밑에 두곤 했다. 매일 선택하는 감정의 종류와 색은 그때마다 달랐다. 영화를 볼 때는 파란색 결정을 삼키는가 하면, 번화가에 나갈 때는 주황색과 노란색이 오묘하게 섞인 결정을 물었다. 새로운 의상이나 곡을 만들거나, 각본을 짤 때는 온갖 색상의 결정을 한꺼번에 물기도 했다. 정말로 기계와 결정 조각이 효과가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이제는 번화가에 나갈 때 사람이 많다고 거북해하지 않았고, 과하게 히스테리를 부리는 일도 드물어졌으며, 새로이 차오른 감정만큼 그의 안에 공백이 사라진 모양인지 마드모아젤 또한 완전히 발언을 멈추었다. 그녀는 스승의 산화된 감정과 부스러진 마음에서 비롯된 산물이었으므로, 기계가 그것을 가득 채우자 반비례하게 입을 다물게 된 것이었다.
사람들의 어깨 사이로 보이는 스승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나는 그와 거리를 조금 더 두고 사람의 등에 몸을 숨기며 그 뒤를 따라 걸어갔다. 짧은 분홍색 곱슬머리가 간혹 부는 바람에 잔잔히 부딪히는 걸 보면서, 얼마 가지 않아 오늘 아침 그가 나에게 말했었던 약속 장소가 나오는 걸 보면서, 나는 속에 찬찬히 고여가는 불쾌감에 입을 악물었다. 더는 마드모아젤은 그와 함께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와 마주 앉은 여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마드모아젤과는 정반대의 머리 색과 눈 색을 가지고 있었다. 긴 생머리의 미인에게 가볍게 목례하던 스승은 이내 수줍은 태가 나는 얼굴로 가볍게 웃어보였다. 창가 자리에 앉은 그들을 멀리서 지켜보던 나는 스승의 눈빛에서 나의 것보다는 조금은 더 가벼운, 그러나 분명히 동류인 감정을 읽어내곤 침음했다. 잔뜩 헤집어진 내장을 구태여 꼬챙이로 쑤시는 것 같은, 아린 통증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왔다. 그리고 그 통증은 곧장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라서, 나는 곧장 화장실로 뛰쳐가 토악질을 했다. 시큼한 액이 뚝뚝 떨어질 때마다 목이 따끔거렸고, 속을 게워냈는데도 여전히 뱃속에 고인 감정은 여전했다. 스승님은 분명히 나만의 것인데. 그는 오직 카게히라 미카의 스승이었고, 예술의 동반자이자 평생 함께할 파트너인데도. 그가 그렇게 정의했고 나 스스로 또한 굳게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는데. 그가 오늘 정의한 감정은 차마 나의 머리로, 그리고 그것을 직접 본 나의 색이 다른 두 눈으로도 이해하기 너무 벅차서. 차라리, 그의 모든 결정 조각을 내가 다 삼키고 그의 모든 감정을 전부 녹여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스승님의 감정 조각은 모두 그의 방, 탁자 위에 높인 보석함 안에 들어있었다. 그 위치를 다시금 상기하면서,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대강 입을 헹구곤 건물을 나섰다. 자꾸만 헛웃음이 나오는 입가 위로 굳어진 눈동자는 올곧았다.
나는 오늘 아침, 그가 입에 물었던 보랏빛 결정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가 삼킨 결정 조각의 이름은 사랑이었다.